1955년 중도일보 학생문예창작 공모전에 당선된 대전 여고생은 작가가 되어 고향을 그리고 민주화운동을 조명했다. 사진은 대전문학관이 보관 중인 이규희 작가의 '속솔이뜸의 댕이'와 '그리움이 우리를 보듬어 올 때' 그리고 중도일보 3·1문예 당선집. |
1961년 3·1문예에 당선한 이덕영 작가의 작품. |
▲전쟁에 지친 아이들에게 꿈을
1957년 1월 18일자 중도일보에 '학생의 창의력 배양, 3·1절기념 문예작품현상공모'라는 기사가 게재됐다. 1919년 자주독립을 외치며 일어선 민족정신을 기리고, 어린이 및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문예창작심을 조장해 앞날을 인재를 발굴할 창작품 모집대회를 갖는다는 설명을 붙였다. 고등학교부에서는 시와 200자 60쪽 내외 분량의 소설, 중등학부에서는 시와 200자 50쪽 내외의 작문 그리고 초등학교 학생의 동요·동시와 200자 5쪽 내외의 작문을 2월 15일까지 중도일보 문화부로 보내달라는 공고가 함께 게재됐다. 중도일보 사장의 상패를 비롯해 문교부장관상과 도지사상장, 국회의 하원이었던 민의원 위원상패 그리고 문학가협회장상 및 상품이 특선작 및 당선작에 지급된다고 설명했다. 1951년 8월 24일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한다는 24절기 중 처서 때 첫 신문을 발행했다. 보통 신문 판형의 절반 크기의 마분지 종이에 앞뒤로 기사를 인쇄한 2개 지면이 전부일 때부터 학생 문예작품 현상공모를 시작한 것으로 사회 여러 분야 중에서도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3·1문예는 1972년 7월로 개최 시기를 조정해 이뤄진 후 1973년 정부의 1도1사 정책으로 신문사가 강제 폐간되면서 중단됐다.
1959년 중도일보에 입사해 역사를 증언해온 안영진 전 주필은 "3·1문예가 등단의 등용문은 아닐지언정, 중고교생에게 창작의욕을 북돋는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하다"라며 "편집국장 추식과 문화부장 임희재처럼 후에 한국문학에 큰 획을 그은 인사들이 당시 편집부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3·1문예의 탄생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원고 2200여편 뜨거운 성원
학생들은 갈고닦은 실력으로 시를 짓고 경험을 담은 수필을 작문하고, 상상을 펼친 소설을 중도일보에 1957년 2월 15일 원고 마감일까지 보냈다. 학교 문예지도 교사는 아이들의 원고를 모아 직접 중도일보를 방문해 접수하거나 자비를 들여 우편으로 보냈으며, 당선작이 발표되는 3월 1일자 신문을 떨리는 손으로 펼쳐 들었다. 충남지역 학교 재학생만을 대상으로 원고를 모집했으나 3회차부터는 전국으로 모집 대상을 확대해 지역 언론사가 주관하는 전국단위 유일한 문예공모전이었다. 중도일보 문화부가 접수된 원고의 예비심사를 거쳐 본선에 진출할 작품을 고르면 중앙문단의 현역 문인들이 최종심사로서 당선작을 선정했다. 1959년 제3회 공모전에 102편의 원고가 접수되더니 1965년에는 2256편의 원고가 편집부에 접수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메마른 대전에 현대시의 뿌리를 심은 정훈(1911-1992) 시인을 비롯해 대전사범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문예를 지도하고 '낙향 이후', '역' 등을 남긴 한성기(1923~1984) 시인, '허 선생'으로 등단해 충남예술인총연합회를 오랫동안 이끈 소설가 권선근(1926∼1989), 박용래(1925~1980) 시인, 동화작가 장욱순(1934~2011) 등이 심사위원을 맡았다.
동화작가이자 문예 지도교사를 역임한 한상수 대전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중도어린이 지면을 비롯해 3·1문예까지 아이들 글이 게재된 신문을 가져다 교실에서 읽어주는 게 중요한 수업이었다"라며 "신문에 실린 동년배의 좋은 글을 보면서 창작을 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라고 회상했다.
▲선배문인과 문학청년 밀고 끌고
3·1문예에서 당선된 학생들의 작품은 지면을 통해 차례로 소개되었는데 가장 우수한 작품을 의미하는 '수작(首作)'이 선정되지 않을 때도 여러 차례 있었다. 동화작가 장욱순은 1959년 심사위원으로 학생들의 시를 심사한 뒤 "작년에도 그랬거니와 대체로 작품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은 어린이들이 문예 공부를 너무 하지 않고 있구나 하는 걱정에서 퍽 서운했다"고 평가를 내렸고, 1961년 권선근 소설가는 "소설을 쓰려는 의지가 있거든 습작에 앞서 선배들의 작품을 많이 읽어 문장이 몸에 배어야지 어거지로 기교를 부려볼래야 그렇게 쉽사리 되는 법이 아니다"라며 후기를 남김으로써 문학청년 후배들에게 서릿발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 또 다른 심사위원은 좋은 글을 마주했을 때 "어린이가 실제로 경험한, 즉 생활체험에서 우러나온 지은이만의 독특한 의지가 넘쳐 흐르고, 재치있고 꾸밈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뚜렷한 글월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틈이 없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학생들이 작성한 글에 엄격한 심사와 더불어 따뜻한 위로의 말을 지면에 남김으로써 자신의 시나 작문에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3·1문예였다. 수작과 당선작 그리고 주작까지 고등부와 중등부, 초등부에 걸쳐 총 11명 남짓의 당선자가 배출됐다. '소녀(少女)'라는 시를 지어 고등부 당선작에 선정된 대전사범학교 조인자 양은 "굳굳한 참음으로 씨를 뿌리고 가꾸어 충만한 아름다움으로 시(詩)의 영토를 이룩해보겠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그녀는 대전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활동 중이다.
▲중앙문단 3세대 기수 배출
15년간 이어진 3·1문예에서 배출된 문학청년은 중앙문단에 새로운 기풍을 이끄는 제3세대의 기수가 되었다. 이규희 작가는 중도일보 신춘문예에 '단념'이라는 소설이 당선된 이후 창작에 매진해 충남 아산을 배경으로 순수 농촌소설인 '속솔이뜸의 댕이'로 앞서 심훈(1901~1936) 소설가가 수상한 동아일보 창간기념 소설공모전에 1963년 당선되면서 크게 회자됐다. 대전공고 2학년 이덕영 군은 1961년 단편소설 '달과 죽음'으로 당선돼 그의 작품이 신문을 통해 2회에 걸쳐 대중에 소개됐는데 그는 다음 해 '꽃'이라는 시가 다시 당선되면서 2년 연속 수상자가 됐다. 그는 1965년 예비심사위원이 되어 3·1문예에 접수된 중등부와 고등부 시를 1차 심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화석', '진달래는 피어서' 등의 작품을 남긴 그는 1983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전고 정건영 작가는 단편소설 '트펌펫'으로 당선돼 '바벨탑 앞에서의 점심식사' 등의 소설집을 냈다. 대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역임한 이진우 소설가, 임선묵 시조시인, 송하섭 작가 등이 3·1문예에서 꿈을 키웠다.
김영수 아동문학가는 "중도일보는 3·1문예 입선작을 모아 책을 내었는데 그때 학생들의 글을 모은 책과 별개로 문예 지도교사들의 글을 모은 작문지도 '문예수첩'을 함께 발행해 창작 교육에 큰 애정을 쏟았다"라며 "척박한 문학환경에 거름이 되었고 너른 마당이 되어주었고, 지금도 그러한 역할이 필요하다고 당부하고 싶다"고 전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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