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고향의 맛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고향의 맛

  • 승인 2022-08-17 07:51
  • 수정 2022-08-19 08:09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KakaoTalk_20220817_074638993
비온 후 푹신한 낙엽 밟는 느낌이 좋다. 물기 머금은 눅눅한 냄새. 소나무에서 조청처럼 흐르면서 굳은 송진 냄새가 확 풍긴다. 전날까지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뚝 그치고 푸른 하늘엔 목화송이 같은 구름이 떠다닌다. 시루봉이 가까워온다. 끈적한 땀이 온 몸에 달라붙자 날파리가 귓전에서 왱왱거리며 성가시게 군다. 깊은 숨을 토해내며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정자에 앉아 숨을 고르며 뜨거운 차를 입으로 호호 불며 마신다. 시원한 바람이 달착지근하다. 산에 오를 때마다 자연에 대한 고마움과 겸허함을 배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보문산이 더는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리석은 인간은 자연을 소유물로 여긴다. 왜 기후위기인가.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데 아직도 깔아뭉개지 못해서 안달이다. 여름에 시루봉에 찾아오던 벌새도 이젠 오지 않는다. 벤치 뒤 꽃나무를 지난해 다 베어버린 것이다. 보문산 관광활성화? 모노레일이 설치되고 케이블카가 오르락내리락하고?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보문산에 올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다.

평소 휴일에 먼 산에 가지 않을 땐 아침 7시께 보문산에 간다. 지난 금요일엔 오전 일찍 일이 있어 10시 넘어서 보문산에 갔다. 산에서 내려오니 12시가 훌쩍 넘어 '고향식당'으로 갔다. 내부가 깔끔하면서 정갈하고 무엇보다 북적북적하지 않아서 안심이 된다. 먼저 숭늉이 나왔다. 구수한 숭늉을 마시고 수저로 보리를 건져 먹었다. 깨물면 톡톡 터지는 것이 앵두 같다. 드디어 보리밥 대령이오! 군침이 확 돌았다. 쌀과 보리가 반반 섞인 밥에 무생채, 비름나물무침, 콩나물무침, 버섯볶음 등을 다 넣고 된장찌개를 넉넉히 넣은 다음 고추장을 넣고 비볐다. 밥을 수저로 크게 떠서 우물우물 씹었다. 나물들과 밥의 조화가 일품이다. 호박과 두부를 넣고 끓인 된장찌개도 부지런히 떠먹었다. 칼국수는 배추겉절이, 설렁탕은 깍두기, 백반집은 밥이 중요하듯 보리밥은 된장찌개가 생명이다. 쌀과 보리는 기질이 다르다. 쌀밥은 푸들처럼 혀에 착착 감기는데 보리는 줄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운다. 이팔청춘 성춘향과 이몽룡이 사랑놀이 하듯 말이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잡히는 가 싶으면 요리조리 달아나고. 보리의 밀당솜씨가 보통 아니다.

옆 식탁엔 중년의 여성들이 밥을 먹으며 얘기꽃을 피웠다. 살 얘기다. 요즘은 어딜가나 살이 화두다. "아유, 나이 먹고 폐경되니까 먹는 족족 살로 가니 속상해 죽겠어.", "그러게 말야. 운동해도 안 빠지고. 작년에 입던 바지가 안 맞아. 어떡하면 좋아.", "늙는 것도 서러운데 살만 찌고. 먹는 걸 줄이는 수밖에 없어." 슬쩍 보니 밥은 반도 안 먹고 파전도 울고 있었다. 아, 저 남은 음식들 다 쓰레기통으로 들어갈텐데.

어릴 적 보리밥을 지겹게도 먹었다. 보리밥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뽀얀 쌀밥 도시락을 싸오는 친구가 무지하게 부러웠다. 빵도 보리로 만들었다. 엄마는 절구에 보리를 넣고 찧어 반죽을 한 다음 팥소를 넣고 쪘다. 거칠고 거무튀튀한 보리빵. 나는 속에 든 팥소만 빼 먹었다. 눈처럼 하얗고 보들보들한 밀가루빵이 먹고 싶은데. 내가 먹은 보리빵은 속을 훤히 내보인 채 발라당 누운 신세다. 그건 엄마 차지였다. 보리밥은 소화가 잘돼 금방 배가 고프다. 방귀도 잘 나온다. 친구들과 오징어 놀이 할 때 한쪽발로 폴짝폴짝 뛰다보면 나도 모르게 방귀가 나온다. 뿡뿡. 지금은 보리밥이 별미다. 보리빵도 웰빙빵으로 불린다. 신문사에 갓 입사했을 때 하루는 점심으로 보리밥을 먹기로 했다. 내가 좋아라 하자 남자 선배가 말했다. "우난순씨, 보리밥 안 지겨워? 우리 어릴 때 많이 먹었잖아." 옛것은 좋은 것이여. 보문산도 그렇다. <지방부장>
2022072701010015025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기고]대한민국 지방 혁신 '대전충남특별시'
  2. 금강환경청, 자연 복원 현장서 생태체험 참여자 모집
  3. "방심하면 다쳐" 봄철부터 산악사고 증가… 대전서 5년간 구조건수만 829건
  4. [썰] 군기 잡는 박정현 민주당 대전시당위원장?
  5. 기후정책 질의에 1명만 답…대전 4·2 보궐선거 후보 2명은 '무심'
  1. 보은지역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에 국가배상 판결 나와
  2. 안전성평가연구소 '국가독성과학연구소'로 새출발… 기관 정체성·비전 재정립
  3. 지명실 여사, 충남대에 3억원 장학금 기부 약속
  4. 재밌고 친근하게 대전교육 소식 알린다… 홍보지원단 '홍당무' 발대
  5. '선배 교사의 노하우 전수' 대전초등수석교사회 인턴교사 역량강화 연수

헤드라인 뉴스


충청 4·2 재·보궐 결전의 날… 아산·당진·대전유성 결과는?

충청 4·2 재·보궐 결전의 날… 아산·당진·대전유성 결과는?

12·3 비상계엄 이후 탄핵정국에서 펼쳐지는 첫 선거인 4·2 재·보궐 선거 날이 밝았다. 충청에선 충남 아산시장과 충남(당진2)·대전(유성2) 광역의원을 뽑아 '미니 지선'으로 불리는 가운데 탄핵정국 속 지역민들의 바닥민심이 어떻게 표출될지 관심을 모은다. 이번 재·보궐에는 충남 아산시장을 포함해 기초단체장 5명, 충남·대전 등 광역의원 8명, 기초의원 9명, 교육감(부산) 1명 등 23명을 선출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을 놓고 여야 간 진영 대결이 극심해지면서 이번 재·보궐 선거전은 탄핵 이슈가 주를 이뤘다. 재·보궐을 앞..

‘전원일치 의견’이면 이유 요지 먼저 설명한 후 마지막에 ‘주문’
‘전원일치 의견’이면 이유 요지 먼저 설명한 후 마지막에 ‘주문’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과 관련, 헌법재판관들의 의견이 ‘전원일치’이면 이유의 요지를 먼저 설명한 후 마지막에 ‘주문’을 낭독한다. 헌법재판소의 실무지침서인 ‘헌법재판 실무제요’ 명시된 선고 절차다. 재판관들의 의견이 엇갈리면 주문 먼저 읽은 후에 다수와 소수 의견을 설명하는 게 관례지만, 선고 순서는 전적으로 재판부의 재량에 달려있어 바뀔 수 있다. 선고 기일을 4일로 지정하면서 평결 내용의 보안을 위해 선고 전날인 3일 오후 또는 선고 당일 최종 평결, 즉 주문을 확정할 가능성이 크다. 평결은 주심인 정형식 재판관이 의견을..

한국소호은행 컨소시엄 공식 첫 걸음…대전지역 금융 기반 기대
한국소호은행 컨소시엄 공식 첫 걸음…대전지역 금융 기반 기대

제4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을 추진하는 한국소호은행 컨소시엄(이하 소호은행)이 1일 기자회견을 열고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다. 전국 최초의 소상공인 전문은행 역할을 지향하는 소호은행은 향후 대전에 본사를 둔 채 충청권 지방은행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며 지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소호은행은 이날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소상공인 맞춤형 금융서비스 계획을 발표했다. 컨소시엄을 이끄는 김동호 한국신용데이터(KCD) 대표는 "대한민국 사업장의 절반 이상이 소상공인, 대한민국 경제 활동 인구의 4분의 1이..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 사랑의 재활용 나눔장터 ‘북적북적’ 사랑의 재활용 나눔장터 ‘북적북적’

  • 재·보궐선거 개표소 설치 재·보궐선거 개표소 설치

  • 3색의 봄 3색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