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영 대전문화재단 시민문화팀 과장 |
장승들의 이사회가 열렸고, 큰 쟁점이 되었다. 장승들은 자신을 밟고 지나간 장사꾼에게 큰 벌을 내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회의가 마무리될 때쯤 조용하게 있던 한 장승은 "장사꾼에게는 벌을 내려도 그냥 재수가 없던 거로 생각하고 말 것이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며 "사람들은 우리가 노해서 벌을 내린 줄 알 테니 우리를 더 잘 모시려 노력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듬해 산짐승이 논밭을 망쳐놓자 마을 사람들은 좋은 술과 음식을 바치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평소 착하게만 살아온 나에게 아버지가 해주신 이야기다. 착하고 만만하게 보이면 세상 살기가 어렵다며 때로는 독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뒷이야기는 진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장승을 뽑아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다. 과거 마을을 지켜주던 장승이 요즘 보이지 않는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그렇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분윳값을 훔친 사람은 징역을 살고, 몇억씩 횡령하고 사기 친 사람들은 떵떵거리며 잘 산다.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한국전쟁 참전용사는 어떤가? 월남전 참전으로 고엽제 피해를 본 용사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피땀 흘린 이름 모를 영웅들까지… 그들은 과연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갈까? 최근에는 민주 유공자법에 대한 논란까지 있다.
문화예술계도 마찬가지다. 백범 김구 선생님은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이 되길 소원하며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문화강국을 위해 애쓰는 문화예술인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을까? 예술이라는 한길만 묵묵히 걸어온 그들도 마을 사람들처럼 살아온 건 아닐까? 조용하게 지내다 보니 시민들은 그들의 소중함과 어려움을 까맣게 잊고 있을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소리든 공익을 위함이든, 때때로 목소리를 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목소리를 내기 전에 그 마음을 먼저 알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해 전, 새 노조를 창립하고 노조위원장이 되면서 개인보다 공공 이익을 위해 일하고자 했었다. 어려움이 생겨도 참고 견디자며 조합원들을 다독였다. 그때의 난 착하기만 했던 마을이장 같은 바보 위원장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야 직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최근 대전문화재단이 시끄럽다. 인사문제, 노조 간 갈등, 직장 내 괴롭힘 등 다양한 문제로 각종 언론과 SNS가 떠들썩하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다. 갖은 어려움에도 장승을 모시며 참고 있던 마을 사람들의 분노가 들고 일어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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