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선 교수 |
오디세이 2막. (아니라니까). 그 사람 시키면 시킨 대로 일을 했겠네? 아니. 어떤 사장이 와도 그냥 좋다고 했겠네? 아니. 노조 같은 것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겠네? 아니. 그 사람 오마이뉴스 대전·충청 지사장이라면서, 심규상 기자가 반대했겠네? 아니. 그럼 심규상 기자가 그 사람 온다고 먼저 사표를 냈겠네? 아니라니까. 기자 이정두는 1989년 KBS 대전방송총국 제2대 노조위원장에 당선됐다. 100% 투표율에 지지율은 83%였다. 전국적으로도 전무후무한 경이로운 기록이라고 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폭도라고 몰았던 청와대 대변인이 KBS 사장으로 부임했다. 노조는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사십 여일 가까운 방송민주화투쟁을 했다. 기자 이정두는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방송민주화투쟁을 이끌었다. 기소 중지자로 전국에 수배됐다.
그에게 노조위원장과 방송민주화투쟁은 터닝 포인트였다. 기자 이정두는 정의감과 오기로 기자가 됐던 초심을 되새겼다. 사명감을 지키며 살자는 다짐을 또 했다. 22년간 현장의 평기자로만 일했던 기자 이정두는 감투를 썼다. 오마이뉴스 대전·충청지사장. 누구는 만석지기 부잣집 아들 '꼴보수'와 꿋꿋한 외길 '급진보'가 함께 일한다는 것이 가당한 것이냐며 혀를 찬다. 괜한 오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것이 이정두의 믿음이다. 이십 년 전부터 산내 골령골 민간인 대학살 사건을 세상에 알려 온 한국의 대기자 심규상은 기자 이정두와 찰떡궁합이다. 이정두는 젊은 심규상에게 배우고, 심규상은 이정두가 후배 언론인들의 강한 버팀목이라며 존경한다. 서로가 하는 말이다. 심규상이 말하길, 기자 이정두는 생활 진보다. 언론인에게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에 대한 언론인으로서 신념과 관점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정두는 1941년 밀양에서 태어났다. 외가와 친가가 만석꾼이었다. 공부를 잘했다. 밀양중학교에 합격했다. 같은 중학에 다니는 읍내 부잣집 외동아들이 자주 주먹질을 했다. 여러 번 참다가 급기야 이정두는 '남천강 다리 아래서 한 번 붙자'고 제안했다. 외동아들이 주먹패 여럿을 달고 나왔다. 1대 20이었다. 먼저 신사답게 악수를 하고 삼십 분간 붙었는데 승패가 안 났다. 서로 잘 지내보자고 싸움을 끝냈다.
이정두는 태권도와 유도와 권투를 배웠다. 태권도 공인 5단이었다. 대학 졸업 후 태권도를 계속하다가 방송사 기자가 됐다. 두 발로 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기자로서 사명감과 정의감도 컸다. 취재 현장에서 22년, 취재 배후에서 20년, 기자 이정두는 사십여 년을 발로 취재했다. 공인할 수 있다면 '발로 취재 9단'은 능히 되고도 남을 것이다. 목요언론인클럽의 부흥과 이달의 기자상 시상도 그의 힘을 크게 입었다. 분명한 것 하나 더. 기자 이정두를 만든 바람의 8할은 그의 아내 김혜경 여사의 강직과 사람 대하는 넉넉함이다.
<이정두의 일기장을 엿보다>를 읽었다. 후배들은 기자 이정두가 후배 언론인들을 격려해 준 덕분에 내면의 근육을 키웠다고 책에 썼다. 기자 이정두가 후배들과 토론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의견이 다를 때도 후배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해 주는 선배라고 책의 에필로그에 적었다. ‘남의 말을 들을 때는 제로상태에서 들어야 한다’는 대학 은사의 말씀을 기자 이정두는 아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색깔과 편견 없이 취재원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 그 전에 발로 찾아갈 것. 기자 이정두가 평기자로 평생 실천하려던 덕목이었다. 거목은 발로 취재한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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