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현근 교수 |
시계추 민주주의 폐단은 전형적으로 경쟁 후보 또는 전임자의 색깔 지우기로 나타난다. 전쟁처럼 치러지는 선거 과정에서 상대 후보의 정책은 그 필요성과 성과와 무관하게 사정없이 비판되고 일방적으로 매도된다. 상대방 정책의 가치와 수요의 객관적 판단보다는 작은 결점이라도 찾아내서 침소봉대한 결과는 선거 후 패자의 좋은 정책의 폐기와 방기(放棄)로 이어진다. 필요하고 좋은 정책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어쩌면 불필요한 선거용 공약들이 단순히 정치적 약속이라는 이유로 자리를 대신한다. 이렇듯 승자독식의 선거 과정과 결과가 정부 사업의 불필요한 수요와 세금 낭비로 이어지면서 정부의 비효율과 불신으로 귀결된다.
민선 8기 들어 선거민주주의 역기능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례가 대전시의 주민참여예산제 예산 삭감이다. 지난 7월 취임한 대전시장은 2021년 배정돼 이미 집행단계에 있는 200억 원의 주민참여예산을 100억 원으로 삭감하는 조치를 했다. 코로나19로 악화한 재정 건전성 보완이 삭감의 명목적인 이유다. 하지만 주민참여예산제 예산은 대전시 전체 예산의 0.31%에 불과하고, 대전시 채무 비율도 2020년 기준 특별·광역시도 중 가장 낮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히려 특정 성향의 시민단체가 해당 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인수위의 색깔론이 삭감 결정에 한몫했다는 설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이명박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11년 제정된 「지방재정법」에 근거를 두고 모든 지자체가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제도이다. 학술적으로 주민참여예산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시민참여제도로 평가되면서 전 세계 유수의 도시들이 앞다투어 제도를 강화해나가는 추세에 있다. 대전광역시의 경우 법 제정 이전인 2007년에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던 박성효 시장이 광역자치단체 최초로 도입한 제도다. 민선 7기 시민주권의 강화 차원에서 제도를 보완하고 강화하면서 2021년 행정안전부 평가에서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가장 우수한 2개 사례로 선정돼 1억 원의 포상을 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방선거 희생양의 처지가 된 주민참여예산제는 선거민주주의 역기능을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처방으로 간주 된다. 고도로 이념적이고 일반화된 의제들의 패키지를 두고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양당제 선거민주주의는 사회집단의 양극화와 갈등을 악화시키는 첫 번째 요인으로 지적된다. 선거민주주의 한계를 지적하는 많은 정치학자는 시민의 현장경험과 지식에 부합되도록 좀 더 구체적인 문제와 관심사를 두고 시민참여 과정을 강화해나갈 것을 권고한다. 서로 다른 배경의 시민들이 이념적 덫에서 벗어나 지역의 문제 발견과 해결 방법을 두고 작은 단위에서 함께 토론하고 학습하고 조정하는 과정을 통해 상호신뢰와 관용의 자세를 키워나가는 것이 사회문화적 분열의 치유책으로 강조된다. 대전시 주민참여예산제의 지원 아래 행정동 단위로 진행되는 마을계획 수립과정과 주민총회를 조금이라도 목격하고 경험한 정치인이라면 이러한 해법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미숙하더라도 주민총회 숙의 과정까지 마친 주민의 판단과 결정의 산물을 충분한 검토와 공론화 과정 없이 단칼에 반토막 낸 것은 주권자인 시민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시민주권을 위한 지방민주주의 확장과 강화라는 시대정신에 거스르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색깔론을 벗어나서 시대정신을 읽고 대전시 주민참여예산제를 다음 세대에까지 물려줄 수 있는 제도적 자산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민선 8기 대전시 위정자들의 전향적 자세와 접근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곽현근 대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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