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광 소장 |
업무상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만났던 시절 호칭을 그대로 쓰든가 아니면 그들이 보기에 내 경력상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호칭으로 불러준다. 그런데 가끔 회의 등 공식적인 자리에 가면 직함이 없다는 것이 조금은 불편하다. 회의장 명패에는 대부분 무슨 기관의 ○○○과장, ???부장 등으로 적는데, 나는 '前 뭐시기長 ○○○'으로 적어 놓는다. 사실 나는 뭐 어떻게 불리든 상관없는데, 이제 직함이 없으니 그냥 이름 석 자를 적어놓는 게 더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한때는 '사'자 붙은 직업이 인기가 있었는데, 이들 '사'자 붙은 직업을 가진 분들과 교수님들은 예외적으로 姓에 직업 이름을 붙인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2022년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는 정당하게 대우받는 호칭이 없다.
특히, 결혼 이후 남편을 위해, 자식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는 가정주부들은 대부분 자기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살아야 하니 부당하다. 서양에서는 여성이 결혼하면 남편을 따라 姓을 바꾸니까 우리가 더 낫지 않느냐 하는 말을 하는 이도 있겠지만, 서양에서는 대통령도 Mr. President로 부르니깐 적어도 호칭에 차별은 없는 것 같다.
2011년 워룸에서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을 지켜보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평상복 차림의 오바마 대통령은 회의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고, 테이블 상석에는 작전 실무를 담당한 마셜 웹 준장이 앉았었다. 그런데 서양이라고 모두 이렇게 격의가 없는 것은 아닌가 보다. 2019년 10월 백악관이 공개한 '이슬람국가(IS) 수장 알바그다디 제거 작전을 지켜보는 사진'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정장 차림으로 기념 촬영하듯 테이블센터를 지키고 있었다.
조금씩 변하고는 있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경직된 서열 문화에 젖어 있다. 차를 타도 어디가 상석이고, 식당에 가도 어디가 보스 자리인지부터 살피는 것이 직장인들의 생존법이다. 몇 년 전에 삼성전자는 앞으로 임직원 간 호칭을 '○○○님', '프로' 등을 사용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그래서 삼성의 조직문화가 수평적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이러한 시도가 각 기관과 사회 각계각층에서 지속돼서 사람들의 의식이 변했으면 한다.
필자는 지난해 시골에 자그마한 땅을 마련해 요즘 일주일에 2~3일 오가며 텃밭 가꾸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딱히 정해 놓은 것도 아닌데, 이웃끼리 서로를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니 오다가다 마주치는 사람들도 나를 사장님이라고 불러주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장이 흔해지니 언제부턴가 회사 사장들은 대표라는 직함을 쓰기 시작했고, 조금 잘나가는 사람이면 회장님이라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
호칭은 곧 지위이고, 지위는 곧 위계다. 위계는 누가 존댓말을 할지와 누구 말에 힘이 실릴지를 정한다. 호칭, 곧 위계는 소통과 창의성 발현을 막는다. 호칭에서 자유로워야 창조적일 수 있는 이유다. 2002년 히딩크는 축구장 안에서 존댓말을 없앴고, 한국축구는 그 어느 때보다 창의적인 플레이를 했다는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한국인들은 '이모님'이라는 호칭을 창조해 창의적인 민족임을 입증했다. 한국인이라면 어떤 땐 엄마보다도 가깝고, 늘 살갑게 챙겨주던 이모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거다. 언제부턴가 식당에서, 시장에서, 가게에서 일하시는 많은 분이 우리의 이모님이 됐다.
그런데 호칭이 애매한 남성들은 왜 다정한 삼촌이 되지 못하고 사장이 됐을까? 권력 지향적인 남성상에 어울려서일까? 아니면 얌체 삼촌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싫어서일까? 아무튼, 호칭 떼고 그냥 나로 인정받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양성광 혁신과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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