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가수라는 수식어조차 부족하여 '엘레지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노래 인생 60년을 맞은 이미자 씨의 히트곡 중 하나인 [저 강은 알고 있다]이다. 이 노래는 1965년에 발표되면서 히트했고 이듬해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노래를 처음으로 듣던 날은 공교롭게 안 좋은 일로 말미암아 기분이 몹시 침잠된 날이었다. 가뜩이나 멜랑콜리(melancholy)하던 차였다. 귀에 쏙쏙 들어와 꽂히는 가사는 바로 나를 비유하는 노래였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한참을 오열했다.
어쩜 저렇게 내 슬픈 마음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나에게 더욱 적확하게 들어맞자면 '비 오는 낙동강에'가 아니라 '비 오는 금강에'가 적합하지만. 어쨌든 지금도 저녁노을이 짙어지면 이따금 금강으로 흘려보낸 내 청춘이 눈물 속에 떠오르곤 한다.
금강은 충청권을 적시는 강이다. 그렇다. 나는 고향이 충청도다. 그런데 지난 내 청춘은 고통과 슬픔의 이중주였다. 먼저, 어머니 없는 삶을 살았다.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난 어머니는 나를 심학규의 딸 심청과 다름없는 극난(極難)의 처지로 내몰았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듯한 절망과 외로움은 당연한 다음 수순이었다. 나이가 차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가정환경은 어려웠지만, 공부는 썩 잘했다. 줄곧 1등을 달렸다. "엄마도 없는 놈이 공부 하나는 정말 잘하네!"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등록금이 없어 중학교에 갈 수 없었다. '없는' 건 비단 이뿐만 아니었다. 진작 알코올에 포로가 된 홀아버지는 아들의 교육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굶어 죽을 수는 없었기에 소년가장으로 나섰다. 갖가지 힘든 생업으로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세상살이가 힘드니까 때론 아무렇게나 일탈도 하고 싶었다.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결심하고 대청호를 찾은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너르고 푸른 대청호에 아직 꽃망울도 채 피우지 못한 아까운 내 청춘을 가뭇없이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후 질풍노도(疾風怒濤) 시기에 지금의 천사표 아내를 만났다. 외모와 속정까지 100점 만점이었기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두 아이가 태어나면서 외로웠던 내 마음에도 비로소 환한 등대가 생겼다.
나는 비록 못 배웠지만, 아이들만큼은 잘 가르치마고 이를 악물었다. 줄탁동시(?啄同時)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둘 다 명문대를 갔고, 직장도 탄탄하다. 아이들이 결혼하여 선물한 손주는 내 삶의 커다란 비타민이다.
얼마 전 아들 내외와 손주도 함께 피서를 다녀왔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가 금강 상류를 연어처럼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술을 한 잔 마셨던 때문이었을까, 불현듯 [저 강은 알고 있다] 노래가 떠올랐다.
- "밤안개 깊어가고 인적노을 사라지면 흘러가는 한세상이 꿈길처럼 애달프다" -
인생은 극구광음(隙駒光陰)이라더니 내 나이도 어느덧 '7학년'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앞으로 남은 인생은 그동안의 상처뿐인 가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아울러 비록 아무리 어려웠지만 비겁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왔던 남다른 내 삶의 이정표에 이제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저 강, 금강은 알고 있으니까.
홍경석 / 작가 · '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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