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난 도시농부가 됐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엔 자그마한 공동체 텃밭이 있다. 올 초 제비뽑기에서 당첨돼 손바닥만한 밭을 분양받아 2년동안 밭을 일구게 됐다. 명색이 농부의 딸이었지만 한번도 농작물을 가꿔 본적이 없어서 흥분됐다. 사실 이 텃밭을 볼 때마다 꽤나 부러웠었다. 거기다 수도시설과 농기구도 있다니, 난 환호성을 질렀다. 4월 중순에 열무와 상추, 쑥갓, 시금치는 씨를 뿌리고 가지, 방울토마토, 고추, 겨자는 모종을 심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싹이 안 나 애가 탔는데 어느 날 싹이 삐죽이 올라왔다. 매일 매일 물을 주느라 마동석 팔뚝이 됐다. 퇴근하면 운동하랴, 텃밭 가꾸랴, 밥 해먹으랴 1초가 금쪽같았다.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상추는 씨보다 모종을 심는 게 튼튼하고 잘 자란다는 것.
역시 농사도 수월하지 않았다. 비료, 농약을 안친데다 거름기가 없어 실패를 맛봤다. 시금치가 잘 크는가 싶었는데 중간에 시들면서 누렇게 뜨기 시작했다. 겨우 두 줌 뜯어다 김밥 재료로 썼다. 여러 사람과 같이 밭을 가꾸다 보니 밭마다 주인의 성향이 보였다. 욕심많은 사람은 공간이 안보이게 빽빽하게 심었다. 풀 한포기 없이 깔끔한 밭도 있다. 나는? 적당히 방목하는 스타일! 일단 공간이 많고 채소와 풀들이 어울렁더울렁 살아간다. 게으른 농부란 말씀. 말로만 듣던 고수도 처음 봤다. 주인이 없을 때 살짝 이파리 두어 개를 뜯어 씹어먹었다. 헉, 정말 화장품 냄새가 훅 끼쳤다.
드디어 내 손으로 가꾼 채소를 먹게 됐다. 유기농이라 시원한 물에 설렁설렁 씻기만 하면 된다. 깊게 파인 스뎅 볼에 밥을 퍼 담고 연하고 파릇파릇한 열무와 상추를 산처럼 얹었다. 거기에 고추장과 들기름, 깨소금을 넣고 써억써억. 일주일 동안 저녁마다 열무비빔밥을 먹는데도 질리지 않았다. 소화도 잘돼 10시껜 배가 고팠다. 상추는 옆 텃밭 아저씨 조언대로 물만 열심히 줘도 잘 자랐다. 쑥쑥 자라는 상추와 쑥갓을 매일매일 뜯어야 했다. 경비실에도 넉넉히 드렸다. 한번은 라면을 상추, 쑥갓에 싸먹어 봤다. 오호, 이런 맛이? 묵은지돼지고기찜, 고등어 조림도 마찬가지. 비빔국수는 면보다 채소가 더 많았다.
초보지만 나도 제법 농부 티가 났다. 흙을 만지다보니 현관엔 운동화에서 떨어진 흙이 날리고 손톱 밑엔 까만 때가 끼기 일쑤였다. 아침 데스크회의 때 엄지 손톱으로 나머지 손톱 때를 긁어내는 일이 많았다. 밭농사는 그야말로 잡초와의 전쟁이었다. 며칠동안 비가 온 후에 가보니 풀들이 순식간에 밭을 점령했다. 이틀간 퇴근 후 풀과 쓸모없어진 채소를 뽑고 정리했다. 풀에 쓸린 팔이 따갑고 허리가 뻐근했지만 속이 후련했다. 그 사이 가지는 팔뚝만했고 주렁주렁 열린 방울토마토는 빨갛게 익어갔다. 고추도 손가락만했다. 하나 따서 우적우적 씹었다. 우엑! 꼬리를 밟힌 살모사처럼 독이 바짝 올랐다. 청양 고춘가? 빈자리에 또 뭘 심어야 할텐데. 이번 주말엔 당근 씨를 뿌려야겠다. <지방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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