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나 대표 |
나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고 나와 국밥을 먹다가 "그래서 그 주인공이 고모할머니의 복제인간인 거죠?"라고 친구가 물었을 때, 고모할머니가 나와요? 하고 묻는 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내게 서사는 어려운 것이지만, 이야기가 가진 힘에 관해 듣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옥인 것은 자신의 경험을 쥐고 사건과 사람을 재단하기 때문일 텐데, 이야기는 정반대의 작용을 인간 안에서 해낸다. 인간이 이야기에 빠져드는 첫 단계는 이입이다. 이입하지 못하면 재미를 느낄 수 없고, 이입이 시작되면 등장인물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가 끝난 뒤 우리는 조금 다른 인간이 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필 굿>을 재미있게 보고 주인공인 메이에게 깊이 이입해 한 에피소드가 끝나고 팔에 돋은 닭살을 쓸어본 사람이 길거리에 지나가는 레즈비언 커플을 보고 속으로 저주를 퍼붓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애초에 호모포비아가 <필 굿>을 재생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한편 그것을 보고 레즈비언은 유머러스하고 예술적이며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다가 급기야 내게도 레즈비언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태도 또한 스테레오타입을 생산하는 것이므로 그다지 좋은 태도는 아니다. 무엇보다 레즈비언은 이미 당신의 동창, 마트 계산대 뒤의 이웃이다.
드라마와 영화, 예능에 레즈비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가 등장하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우영우의 이야기가 매주 화제에 오르는 현상은 반가운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자폐인에 대한 천재적인 이미지, 그것에 호기심을 보내는 시선 또한 자폐인의 삶을 어렵게 한다. 게이 출연자들이 연애 상대를 물색하는 프로그램으로 릴리즈 전부터 '하트시그널 게이 편'으로 주목받았던 <남의 연애>가 방영되는 지금, 세상에 필요한 태도는 이런 것이다. 이입 없이 대상화하는 것을 멈추기. 현실에 존재하는 레즈비언과 게이와 자폐인에 대하여 유일하게 지닌 상을 거두기.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애 예능은 죄다 헤테로 편이네’라고 생각하기.
우리가 이러한 이슈 앞에서 분통을 터뜨린 경험이 있다면, 저스틴 토시와 브랜던 웜키의 발견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로스차일드와 키퍼는 사람들이 도덕적 범죄에 공모한다고 느낄 때 죄책감을 덜어 좋은 사람이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보호하려고 애쓴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타인을 향한 분노와 처벌하려는 태도로 표출한다. 일단 분노를 표출하면 자신을 다시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104) '그랜드스탠딩 : 도덕적허세는 어떻게 올바름을 오용하는가' 저스틴 토시, 브랜던 웜키 지음, 김미덕 옮김, 오월의 봄, 2022
위악적인 사람보다 위선적인 사람이 낫다고 여겨왔지만, 어떤 도덕적 분노는 방어적이라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인다. 더 나은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답답해하는 이에게 내밀 수 있는 것은 좋은 이야기다. 인간은 타인에게 이입하는 것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서한나 '보슈' 대표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