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윤수 교수 |
고3 수학 수업시간 때의 일이다. 수능준비에 빠듯한 진도와 획일적인 풀이법을 설명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기에, 사실 수험생에겐 잘 어울리지 않는 수업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항상 또 다른 풀이법을 학생들에게 직접 나와 설명할 기회를 주셨다. 그날의 나는 머릿속에 번뜻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칠판 앞으로 당당히 나갔다. 옆에서 나와 같이 또 다른 방법으로 고민하던 짝꿍인 광수도 같이 칠판 앞으로 나갔다. 분필을 들고 문제에 나온 그림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는 그림, 또 다른 직선을 그려 나만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둘의 풀이방법을 칭찬하셨고, 여기에 더해 더 쉽게 푸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정확히 25년 전 수업시간이지만 나의 뇌리에 정확히 그리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매일같이 보는, 머리부터 몸속 여기저기에 피가 나고 팔다리가 부러진 중증외상환자가 여기 있다. 그러나 이 환자는 단순히 출혈 부위만 해결하고 뼈만 고정해선 안 된다. 바로 뒤따라오는 여러 합병증, 즉 폐렴, 패혈증 등을 해결해야 비로소 건강을 되찾게 된다. 역시나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합병증들이 모두 생기고 있다. 불현듯 25년 전 고3 시절 어려운 수학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 새로운 풀이방법을 생각해내 칠판 앞으로 걸어나가던 심정이 생각났다. 어려운 문제가 혼자 도저히 안 풀릴 때는 짝꿍 광수와 머리를 맞대고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곤 했다. 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두꺼운 교과서에는 치료 방법, 약, 검사 등등 누구나 다 아는, 혹은 의료진들이 생각하는 모범 정답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로 도저히 환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상태가 미궁으로 빠지는 경우가 있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새로운 선을 하나 그리거나 도형을 거꾸로 바라보는 심정으로 이 환자를 다시 바라본다. 수학 문제 풀이 시작은 기본 공식, 개념이라는 것처럼 내 앞에 있는 이 환자에게서 처음 문제부터 하나씩 다시 되돌아보고 지금 상태에 맞는 약물이나 또 다른 치료법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는 환자는 새롭고 현명한 치료 길을 찾은 덕분에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마치 환자는 난해한 수학 문제가 풀리는 것처럼 건강의 길을 올바르게 찾아간다.
수학 노벨상이라고 하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는 1970년 필즈상을 수상한 히로나카 교수 수업을 듣고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수학에 대한 싹이 굵어지고 아울러 더 발전, 성장하는 계기가 되어 필즈상까지 수상했다. 허준이 교수 스승인 히로나카 교수가 쓴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학교에서 수많은 것을 배우는 이유에 대해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배워나가는 과정에서 지혜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대상을 깊이 살펴볼 수 있고 결단력을 유도하는 힘도 갖게 해준다. 나는 환자를 보며 막막하고 답답할 때면 25년 전 수학 선생님을 통해 배웠던 '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이 환자를 살리고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가족 품에 돌려보내기 위해 25년 전 배웠던 수학 공식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며칠 동안 고민하며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얻었던 지혜를 사용한다.
환자가 건강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서는 나와 같은 외과의사 하나의 힘으로는 어렵다. 병원 내에 수많은 의료진 모두의 힘이 합쳐져야 그것을 이룰 수 있다. 더불어 지금의 나는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지혜가 도와주고 있다. 몸속에 있는 피의 두 배가 넘는 10ℓ 이상 수혈을 받고, 팔다리 네 개 중 세 개가 부러진 이 환자가 다시 살아나고 건강을 회복하는 이유는 수많은 의료진이 지혜와 함께 힘을 보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환자가 건강하게 회복한 이유 중 하나는 25년 전 선생님이 나에게 가르쳐주신 지혜가 한몫한 것이 분명하다./대전을지대학교병원 권역외상센터 외과 문윤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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