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 회장 |
한국에서 선사문화의 단초는 광복 후 1960년 초 함북 웅기 굴포리에서 구석기 유적지 발굴부터이다. 이어 1964년 충남 공주 석장리에서 구석기 유적지를 발굴하여 고고학상 큰 성과를 거두었다. 최근 대전의 시세 확장과 더불어 대규모의 개발사업이 일어나 금강의 지류인 대전의 3대 하천 주변에서는 본격적인 조사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대전의 인간 역사에 대한 자료가 축적됨에 따라 대전의 역사를 살피는 데 많은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세인들로부터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그간의 성과를 보면 괴정동(현 내동) 출토유물(1967년 7월 고검식 동검, 동경 2개, 동탁 2개, 대쪽모양동기, 방패형 동기, 원개형 동기, 무문토기, 흑색토기), 문화동 출토 동검(1970년 여름 보문산 까치고개), 탄방동 출토유물( 세등선원 부지, 동검 1개, 동모 1개, 동끌 1개), 사성동 고인돌 유적(1977년 11월 대청댐 수몰 지역 내), 관저동 지석묘 유적(현 원내동 유적-1977년 충남방적 부지), 칠성당 지석묘군, 한국과학기술대학정문 옆 (1986.3.9 옛.생.돌 답사-무문토기편 및 빗살무늬 토기편 수습), 둔산동 선사유적 (1991.3.18.), 구즉동 유적(1992.1. 구석기 유적), 구성동 유적(1992.8. 기상청부지, 청동기 집자리 10기), 비래동 고인돌 유적(1997.4. 요녕식 동검 등), 노은동 유적( 1997(청동기 집자리), 용호동 유적(1998.11. 구석기 유적), 궁동유적(1999), 대정동 유적(2001. 송국리형 집자리), 용산동 테크노밸리(2005.11. 청동기 주거지)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내륙 지방인 대전에 수많은 선사유적이 발견되었고 앞으로도 삼대 하천을 주변으로 한 얕은 구릉 저변부에서 계속 이러한 선사유적들이 발견되리라 생각된다. 특히 괴정동의 청동기는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단계의 한국식 청동단검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이며 그 문화 수준도 대단히 높은 단계이다. 이것은 충남지방 나아가 대전지방이 청동기문화의 중심지이며 한가운데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 시대에는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나 빠른 속도로 지형이 변해가고 있다. 미처 전문가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유적이 훼손되고 사라져가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운 실정이다. 우리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역사의 자료가 되는 유적과 유물을 철저히 보존하고 실상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역사에 관한 무지의 시대였던 1967년 괴정동 유적은 밭을 갈던 농부의 쟁기 끝에 걸려 아무런 준비 과정 없이 파헤쳐졌다. 그래서 괴정동 유적은 변변한 보고서도 없이 파헤쳐진 돌널무덤의 흑백사진 한 장만 덩그러니 전한다. 괴정동 유적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역사나 문화 등 거창한 말만 앞세우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여 씁쓸한 기분마저 든다.
대전은 일찍이 금강과 삼대 하천 주변에는 선사인들이 들어와 삶의 터전을 이루었었다. 대전에서 출토되어 전해지는 "농경문청동기"에는 오랜 시절 이 땅에 씨 뿌리고 경작하는 선사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기록으로 남겨진 대전 최초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대전 괴정동 출토의 청동기를 보면 대전은 가히 청동기문화의 메카라 할 만하다.
2007년 9월 12일 대전시청 회의실에서 대전역사문화단체로 구성된 '괴정동청동기유적발굴 40주년기념추진위`는 4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를 갖은 뒤 그 현장을 찾아 표지석 건립행사를 가졌다. 그 취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문화 유적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지역 문화유산의 관심과 유적의 훼손을 막고 대전이 청동기 메카로서의 위상을 세우는 단초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10여 년이 지난 2022년 다시 찾은 괴정동 청동기 유적지는 그 당시와 별반 변한 것은 없었다. 기록으로 남은 한밭 최초의 인물이 경작하던 이 지역의 공간적 의미와 청동기문화의 메카로서의 우리 지역의 위상을 다시 생각해볼 때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