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단연 소리예술이다. 눈으로도 듣고, 나아가 온몸으로 듣기도 한다. 사람 귀로 들을 수 있는 주파수는 보통 20Hz~20kHz라고 한다. 나이, 성별 등 신체조건을 포함한 개인차가 있다. 개는 45kHz, 고양이는 65kHz까지 듣는다 한다. 돌고래나 박쥐가 내는 초음파는 사림이 들을 수 없다.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영역의 소리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오래 전에도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소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노자도덕경 41장에 나오는 말이다. "크게 모난 것은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 큰 음은 소리가 희미하고, 큰 형상은 아무런 형태가 없다.(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이와 같이 도는 숨어있어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으나 아낌없이 베풀고 만물을 성취시킨다는 도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말이다.
사방을 예기 하지만 그 끝이 어디인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모서리도 알 수 없다. 큰 그릇은 더디게 만들어진다. 세간에 많이 쓰이는 말이다. 큰 소리는 희미하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우주가 움직이는 소리는 듣지 못한다. 그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우주의 모습이 보이는가? 오감으로 느끼는 인식 밖의 세상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느끼지 못한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느낀다. 아는 만큼 인식되는 것이기도 하다.
문자나 말을 제거한 문학, 음악에서 소리를 제거하거나 미술에서 공간과 형상을 제거하면 무엇이 될까? 김정래의 "낙파 이경윤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의 무현금 연구" 논문을 흥미진진하게 본 일이 있다.
'월하탄금도' 이경윤·견본수묵·31.2x24.9cm·고려대학교 박물관 |
높은 산 중턱인 듯하다.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쓰러질 것 같은 절벽아래 한 사람이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다. 눈앞에 무한공간이 펼쳐져 있고, 둥근 달이 떠있다. 오른쪽으로부터 퍼져 나가는 사선의 동세가 생동감을 준다. 그러면서 앞 쪽 바위를 강묵으로 처리하여 그림이 퍽 안정되어 보인다. 사이에 더벅머리 동자가 앉아 불을 지피고 있다. 앞에 세발 달린 풍로가 있고 그 위에 부드럽게 휜 주구를 가진 탕관이 놓여있다. 차를 끓이고 있는 것이다.
공교로운 달밤, 깊은 산속에 앉아 거문고 연주하며 차를 즐긴다. 얼마나 곱고 멋스러운 일인가?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거문고에 줄이 없다. 남종화에서는 워낙 생략이 많아 생략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무현금(無絃琴)이란 주장도 만만치 않다. 필자에게는 무현금이든 생략이든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소리 없는 소리, 마음의 소리를 연주하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연주하고, 듣고 있다. 자연에 가까운 소리, 하늘의 섭리가 반영되어야 가장 아름답다 하는 것이 동양적 사고다. 자연이 음악이고 음악이 자연이다. 노자의 사상이기도 하다.
무위자연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상이다. 무위는 행위가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과장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무와 유는 상호 의존적이다. 때문에 영구하다. 무가 있어 유가 있고, 유가 있어 무가 있는 것이다.
의견대립은 전체적인 시야를 갖지 못하고 부분적인 것을 절대적 진리로 간주할 때 일어난다. 무절제한 대립은 낭비이다. 그림을 보며, 더 큰 세상을 읽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하자.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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