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나 역사뿐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논어 자한편에 후생가외(後生可畏)라 해서 후진을 두려워해야 한다 했다. 그 미래가 변화무쌍하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어디 후진뿐이겠는가? 선배는 그러한 과정을 모두 거친 사람이다. 옆에 있는 사람의 도량과 미래를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겸손하고 상호 존중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함에도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으로 종종 착각한다. 그로인한 병폐도 만만치 않다. 좋은 예제가 후고구려 궁예(弓裔, ? ~ 918)의 관심법이다. 2000년 KBS사극 '태조왕건'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지금도 종종 인구에 회자된다. 궁예는 신라의 승려였다. 신라가 몰락하자 898년 세력을 모아 스스로 왕위에 올라 후고구려 시조가 된다. 구세제민(救世濟民)이 꿈이었으나 완전한 국가체제를 갖춰보지도 못하고 제거된다. 뒤이어 등장한 고려가 부정적으로 서술한 측면도 있겠으나, 폭군으로 서술된다. 학정(虐政)의 도구중 하나가 바로 관심법(觀心法)이다. 상대방의 속마음을 모두 안다는 것이다. 자기마음대로 상대를 재단하여 생사여탈(生死與奪) 하였다. 심지어 부인이나 두 아들까지도 죽였다. 자기 마음도 모르면서 어찌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만연하고 있다. 세상을 지레짐작하거나 함부로 재단한다. 작은 행동 하나에도 수많은 억측과 견해가 따라다닌다. 그로 인한 혼란과 사회적 손실이 얼마나 큰가? 있지도 않은 일을 거짓으로 포장하거나, 침소봉대(針小棒大), 왜곡 해놓고, 추측, 추정한다 하면 법에 저촉되지 않는 모양이다. 지난 몇 년간 특히 심했지 않나하는 생각이다. 세상을 뒤집어 놓고 법적으로 하자 없다고 털어버리면 될 일인가? 늘 강조하지만 법의 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도덕적 심판이요, 역사적 심판이다. 정치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SNS가 일반화 되면서 너나없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패망의 길로 치닫는 거짓사회에 대하여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궁예는 미륵불이라고 자처하며 폭군이 되었다. 미륵불은 미래에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 아닌가? 미륵이 구현할 이상향은 용화세계이다. 불자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 용화세계는 부처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용화세계에 합당한 노력을 하라는 것으로 받아드려진다. 모든 중생이 진리에 눈 뜨는 세상 아닐까? 열심히 공부하고, 옷과 음식을 남에게 베풀며, 몸과 마음을 닦아 공덕을 쌓으라는 말 아닐까?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 아닐까, 본질이 아닌 것으로 혹세무민하지나 않는가, 필자 역시 늘 경계한다. 옛 성현의 말을 되새기다 보면, 세월이 무수히 흘러도 왜 이리 변화가 없을까, 의문을 갖게 된다. 구제불능의 인간세상 속성일까? 본질을 보지 못하는 탓일까?
문월도, 이정, 지본담채, 16.0×24.0cm, 간송미술관 소장) |
탄은의 <문월도> 2폭이 전한다. 다른 하나는 나무에 앉아 나무를 가리키는 그림이다. 보이는 바와 같이 그림 왼쪽에 그믐달이 떠있고, 바위에 걸터앉은 사내가 그를 가리키고 있다. 정수리에 머리카락이 없는 더벅머리에 맨발이다. 관자가 탈속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얼굴은 천진난만한 환희로 가득하다. 도를 깨우친 희열로 보인다.
달을 보라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다는 견지망월(見指忘月) 고사를 그린 것이다. 손가락만 보고 달을 잊었다. 본질은 보지 못하고 지엽적인 문제로 실체를 가리는 것을 말한다. 불가에 전하는 말로, "진리는 하늘에 있는 달과 같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지만 손가락이 없다고 달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한다.
주역 계사전에, 글은 말을 다할 수 없고 말은 뜻을 다할 수 없어 형상을 세워 뜻을 전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 立象盡意)는 말이 있다. 하나의 그림이 더 많은 말을 하고 뜻을 전하기도 한다.
사회나 개인을 모함하거나 왜곡하는 것이 소통의 최대 걸림돌 아닐까?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혹세무민하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