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태 교수 |
우리 사회에서 1등은 우월감, 꼴찌는 열등감의 대명사로서 대비된다. 남자들 모이면 "옛날에 1등 한 번 안 해본 사람 있냐"며 허세를 부리고 자녀들이 한 번이라도 1등을 했거나 줄반장이라도 하면 동네방네 소문내며 어깨에 힘주고 다닌다. 반면에 1등과 거리가 먼 사람은 1등은 그냥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중얼거림과 함께 애써 관심이 없는 척 외면한다.
나도 학창시절에 '1등과 꼴찌'를 둘 다 체험해봤다. 시골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내가 도시의 고교로 진학하자마자 꼴찌를 맛본 것이다. OMR카드 마킹 실수로 반 꼴찌를 맛본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던 내가 꼴찌를 하다니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 더 무서운 것은 반 평균 점수를 갉아먹었다고 공개적으로 야단을 치신 선생님과 급우들의 매서운 눈초리였다. 다음 달 월말고사에서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와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그때의 악몽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독재정권 아래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반 평균의 서열에 따라 매를 맞았던 어둠의 기억이 있다. 내 점수와는 상관없이 선생님들은 우리 반이 반 평균 꼴찌를 했다는 이유로 단체기합을 가했다. 더 억울한 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보다 더 등수가 높은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내 점수가 아무리 90점을 넘어도 1등이 아니면 인정을 못 받아 억울하고 답답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현재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아직도 상대평가를 기반으로 한 석차를 기반으로 등급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30년 전에 내가 겪었던 성적의 악몽을 왜 21세기의 청소년들도 똑같이 겪어야 한단 말인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고 성적과 사회생활은 별개라는 말을 하면서 왜 '1등과 꼴찌'라는 서열은 우리 사회에서 없어지지 않는 것일까?
사회생활에서 성적은 행복에 큰 영향이 없는 것 같다. 고교 동창회에 나가보니 1등을 했던 친구는 대기업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어렵사리 꾸려가고 있고, 꼴찌는 작은 인테리어사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학창시절의 성적과는 무관하게 둘 다 가장의 무게를 견디며 묵묵히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공부 잘해서 고위 공무원이나 판·검사, 의사를 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리 행복하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
교육학 측면에서 1등과 꼴찌를 가리는 상대평가는 더 이상 유효한 용어가 아니다. 즉, 시험을 통해 석차를 가리는 건 한 가지 기준에 대해 유효한 것인데, 만약 그 기준이 달라진다면 그 석차는 전혀 유효하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상대평가 기반의 수능시험은 암기력과 논리적 사고를 측정하는데 유효하지만 창의력과 문제해결능력과 같은 미래인재 역량을 측정하는 데는 전혀 소용이 없다.
학창시절의 석차가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한 인물이 있다. 하버드대 토드 로즈 교수는 청소년기에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로 매우 산만하고 충동적인 학생으로 고교에서 퇴학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는 20대 중반에 공부를 시작해 하버드대의 교수가 됐다. 그의 책 [평균의 종말]은 상대평가 기반의 수능체제의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청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1등과 꼴찌'를 구분하는 상대평가의 결과는 매우 신중하게 해석돼야 한다. 높은 변별력을 제공하는 상대평가의 장점도 있겠지만 오히려 단점이 더 크다. 상대평가가 적용되는 교실에서는 협업이 이뤄지지 않는데 치열한 경쟁을 통해 상대방을 밟고 일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평가에 기반을 둔 수능시험으로는 미래사회 인재의 역량을 배양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수능시험의 막강한 힘은 사교육 유발의 원인으로 지목되며 초중등 교육과정과 시험의 형식과 내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는 제발 상대평가의 폐해를 인정하고 수능시험을 재검토하도록 정치권에 강력히 요청해야 한다. /김정태 배재대 글로벌비즈니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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