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단양군 장현리 산악에서 37사단과 2작전사령부 등이 유해발굴을 하고 있다. |
제72주기 6·25전쟁 발발일을 사흘 앞두고 찾아간 충북 단양군 장현리 무명고지 5부 능선 부근. 대형 태극기 앞으로 37사단 단양대대 및 제2작전사령부 그리고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소속 장병 100여 명이 전사자를 찾는 발굴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무명고지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500m 반경에 낙엽을 모두 긁어내 흙 바닥을 드러내고 삽과 호미로 조금씩 파내어 전투의 흔적을 찾는 과정이다. 나무뿌리에 가로막혀 삽이 들어가지 않을 때는 톱을 가져와서, 작은 유품이 발견된 곳에서는 금속탐지기를 동원해, 그리고 불발탄이 발견된 때는 폭발물처리반(EOD)이 출동해 처리하는 등 정성과 인내심 없이는 이겨낼 수 없는 작전처럼 보였다.
37사단 단양대대 심재진 대대장은 "8사단이 고립을 각오하고 치열한 방어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국군 158명이 전사하고 308명이 실종되는 동안 북한군은 1872명이 전사할 정도로 격전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단양 전투는 국군 제8사단이 중앙선 축선을 따라 남진하는 북한군 제12사단 제30·32연대와 1950년 7월 6일부터 7월 12일까지 치른 방어전투다. 파죽지세 몰아치는 적에 맞서 남하를 저지하고 후방에서 반격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단양의 험준한 산악에서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육군본부가 강릉에서 철수해 대구까지 이동한 제8사단에게 "남한강 북동지구에서 남진을 기도하는 적을 제천 부근에서 저지해 고립을 각오하고 고수 방어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것도 이때다.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남한군이 대치한 지역이자 소백산 자락의 여러 봉우리를 옮겨 다니며 지연전을 벌여 7일 동안 지탱함으로써 후방의 국군 부대들이 저지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특히, 단양 시내에 진출한 적의 전방지휘소가 있던 초등학교 건물을 기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참호 속에서 발견된 반지와 발사되지 않은 총기 탄약. |
2작전사령부 유해발굴단 최응규 소령은 "발사되지 않은 완탄과 수류탄이 발견됐는데 충분한 시간을 갖고 철수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철수하거나 다수의 희생이 있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라며 "작은 부분 유해라도 찾을 수 있도록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고 설명했다.
충북 단양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에 내걸린 태극기. |
김기환 37사단 112보병여단장은 "남침을 방어하는 상황, 치열한 격전을 벌인 현장에서 산화한 선배 전우를 모두 수습해 가족의 품으로 보내드리겠다는 각오로 작전에 임하겠다"고 설명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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