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강생이 물었다. 자기는 모르는 말이라며 버스킹이 뭐냐는 것이다. 정말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님을 알면서 길거리 공연이라고 답했다. 그럼 그렇게 쓰면 되지 왜 외래어를 쓰냐는 것이었다. 누구 못지않게 우리말을 사랑한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언어요, 문자임을 안다. 우리말에는 전통과 같이 고유한 것과 우리의 것이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우리 속에 녹아든 것도 우리 것이다. 아름다운 고유어를 빛내는 것도 소중하지만 어휘가 늘어나는 것이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개방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더니, 그런 것은 옳지 않다며 우리말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 역시, 지나친 외래어나 신조어 사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품격 있는 우리말이 있음에도 굳이 외래어나 신조어를 사용하는 것에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적당한 표현이 없는 경우도 있고, 어감이 다른 경우도 있다. 모든 언어에 외래어가 있는 이유 아닐까? 그래서 사전이 있고, 거기에서 어원을 밝히지 않는가? 신조어 역시 잘 정착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유행처럼 일시적으로 사용되는 말도 부지기수다. 필요에 의해서 생성소멸 되는 것이라 본다면 지나친 방관일까? 우리말을 잘 보전해야하는 것이 먼저지만, 새로운 말의 수용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특히 한글의 세계화를 꿈꾼다면 무수한 단어, 어휘가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
어느 것이 개방적인 것일까? 개방적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니, 어느 쪽이 최선일까? 판단이 서지 않는다. 얼마 전에 사고력, 생각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본 일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생각이요, 그 힘이 우리의 진로를 결정한다. 이제 사고의 자세에 대한 고민이다. 폐쇄된 고정관념으로 편협된 자세를 취하고 있지나 않을까?
많은 한국인 속에 다른 동북방 민족 한 사람이 끼어 있다고 금방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들이 모여 있으면 비교적 알기가 쉬워진다. 그조차 선험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다름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알 수가 없다. 맑은 물에 색깔 있는 액체 한 방울 떨어트렸다고 물의 색이 변해 보이지는 않는다. 많아지면 변한다. 특성이 드러난다. 결국 집단화 됐을 때 문제가 된다.
우리는 곧잘 의식에서도 동서양의 차이를 운운한다. 지역적 특색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것은 유전적이거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집단의식이나 집단행태의 차이 아닐까? 인간의 사고방식은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서로 다름을 낳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또는 집단의식, 환경에 의해서 선별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일정 사고의 틀에 갇히는 것이다.
옛 사람이 지금 같은 다양한 지식정보를 접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 전달 매체가 지금과 비교 될 수 없지 않은가? 생각의 크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생각의 크기가 정보의 크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크기를 바꾸는 첫 번째가 무엇일까? 생각을 대하는 자세 아닐까?
컴퓨터는 이진수가 기본이다. on과 off, 참과 거짓밖에 없다. 그림 공부만 한 사람으로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울 때 제일 낯설었던 것이 이진수와 작업흐름도(flow chart)였다. 흑백으로 단정 짓거나 작업의 경로를 논리적으로 모색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쪽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퍽 우스운 이야기이겠으나 필자로서는 새로운 생각의 자세를 체험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흑백논리를 위험한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 역시 다르지 않다. 흑과 백사이의 무한한 회색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흑백을 쪼개어 들어간 것이 회색이다. 무한대로 나눌 수 있다. 무한대의 하나하나 역시 흑백으로 나눌 수 있다. 작업흐름도 또한 흑백 논리의 연속이다. 모의로 하는 도상 시험이다. 그것이 완성되어야 프로그램에 들어간다. 미래사회는 정보처리 과정과 같은 사고를 할 것이다. 논리적이고 구조적이며 창조적인 방법 말이다. 바로 디지털사고이다. 이제 아날로그사고는 디지털사고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어령 박사가 말한 디지로그시대 아닌가?
지나친 흑백논리, 진영논리가 사회적 병폐로 회자되고 있다. 그 바탕에는 한물간, 정보 획득과 사고에 대한 폐쇄적인 자세, 아날로그 사고가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디지털 사고와 정보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느 것이 개방적인 것일까? 판단이 서지 않으면 알고 있는 것, 자신의 가치기준을 부정해 보면 어떨까? 부정적으로 생각해온 것을 공부해 보는 것은 어떨까? 덤으로 중요한 하나를 체득하게 된다. 충분히 생각하고 일하는 것이다. 뛰면서 생각하거나 뛰고 나서 생각하는 것보다 효율적임을 알게 된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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