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현충일이면 TV에서 전쟁영화와 드라마를 보여줬던 기억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TV에서도 현충일 전후 한국전쟁 관련 프로그램들이 사라지고 있다. 특집 프로그램이 사라진 자리에는 예능프로 재방송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현충일의 의미를 알려줬던 미디어도 이제는 그날을 기억하지 않는 것 같다.
미디어에서 사라진 현충일의 흔적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발견했다. 취재를 핑계로 찾는 프로야구장이다. 현충일 사흘 전 한화이글스 선수들이 홈경기에서 가슴에 태극기를 부착하고 나왔다. 유니폼 역시 팀 고유의 주황색이 아닌 회색과 검은 줄무늬로 디자인된 군복 형태의 유니폼이었다. 매년 6월이면 야구장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KBO는 매년 보훈 이벤트로 6월 한 달간 KBO 전 구단이 밀리터리 유니폼을 제작해 홈경기에서 착용하고 있다. 국가유공자 초청과 군악대 연주, 추모 행사도 6월 동안 각 구장에서 진행된다. 야구장을 찾는 팬들은 선수들의 유니폼을 보고 그제야 현충일이 가까워졌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현충일 당일에는 축구팬들의 시선은 대전월드컵경기장에 집중됐다. 경기 시작 5시간 전부터 경기장 주변에는 태극기가 물결이었다. 물론 현충일과는 거리가 먼 태극기였다. 칠레와 평가전을 치르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한 태극기였다. 경기 시작이 임박하면서 경기장 분위기는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심판이 전반전 시작 휘슬을 불기 직전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나왔다. "오늘은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산화하신 순국 순열을 기리는 현충일입니다. 경기 시작에 앞서 묵념이 있겠습니다. 일동 묵념" 사회자의 낮은 구령에 4만 명이 가득 찬 대전월드컵경기장이 수초 간 침묵에 잠겼다. 항상 활기가 넘쳤던 그곳이 순간 정적에 잠기는 장면은 10년 이상 그곳을 드나들었던 기자에게도 처음이었다. 심판의 휘슬과 함께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경기장은 다시 열광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현충일의 의미가 더욱 퇴색된 느낌이다. 코로나 방역 완화로 인한 안도감과 지방선거로 생긴 휴일이 겹치면서 현충일이 국경일이 아닌 공휴일이 된 것이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스포츠 현장에서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겨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이래저래 씁쓸한 호국보훈의 달이다.
금상진 기자 jod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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