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세대 전 만해도 애사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성장하면서 제일 먼저 만든 모임도 위친계(爲親契)다. 간략히 말하면, 부모의 회갑연과 장례식을 위한 모임이다. 당사자의 결혼이나 자식에 대한 내용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특히, 애사에는 반드시 가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모임에 따라, 하룻밤 같이 지새워야 한다는 회칙이 있는가 하면, 장지에 함께 가야하는 규정이 있기도 했다. 지키지 못하면 벌금이 부과되기도 한다. 경사보다 애사 때는 위로금도 배로 하였다.
고인의 삶에 대한 감사와 그 뜻을 기리고, 상주에 대한 위로와 배려가 바닥에 깔려있다. 망인의 수고로움으로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요,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기 때문이다. 두레와 함께 감사하고 배려하는 공동체의식이 잘 살아있는 풍습의 하나다. 그러한 좋은 풍습이 모두 사라지지나 않을까? 노파심이 인다. 의식이 얇아지니 절차도 줄어들고 장례문화도 변화한다.
또 하나는 만남의 장이라는 것이다. 애경사를 통해 일가친척, 이승에서 맺어진 많은 인연이 재회한다. 생활에 쫓겨 소원했던 관계를 지속시킨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창구이기도 하다. 돌아보는 시간이요, 관계의 시야를 넓히고 깊게 하는 시간이다.
오늘도 다름없이 오래되거나, 오랜만에 만나는 벗들이 있다. 연륜이 묻은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지만, 대부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뿐인가? 함께 하지 못한 사람의 소식도 듣는다.
필자는 입대하여 하사관학교에 차출되었다. 평소 군 생활은 군 생활답게 한다는 각오였지만 당하고 보니 그리 쉽지 않았다. 수명씩 기절해야 훈련이 끝나곤 했다. 그때 생각으론 지옥이 따로 없었다. 가혹한 훈련으로 힘도 들었지만, 고통과 인내심을 키워주려는 의도인지 한 달여 물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 화장실 구석에 받아놓은 물이나 논바닥 물을 퍼 마시다 발각되어 구타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2주 정도 지났을 무렵, 1년 여 먼저 입대한 지인이 중대로 찾아왔다. 학과는 달랐지만 동아리 활동을 같이 했던 친구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훈련이 받을 만한지 물었다. 다 죽이고 싶다고 답했다. 나 같은 사람도 해냈다며 위로하고 격려했다. 무엇이 제일 하고 싶은 지 물었다. 물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물을 한주전자 같다 주었다.
하사관학교 6개월 교육의 마지막은 일주일 유격훈련이다. 공수훈련을 마치고 100리 행군으로 유격장에 도착한다. 도착한 토요일 저녁 행정실에서 방송으로 호출을 한다. 가보니 예의 친구가 유격장에 와 있었다. 그는 필자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유격훈련기간 동안 취사장에서 일하라 했다. 일요일 종일 무 썰고, 야채를 다듬었다. 저녁 식사 후 술과 안주를 준비해 왔다. 술잔 기울이며 심신을 달랬다. 잠시라도 희희낙락하며 정담을 나누고 그의 배려에 감사했다. 덕분에 적응도 잘 하고 있었고 용기도 얻었다. 대화 끝에, 훈련받으러 왔지 무 썰려고 온 것이 아니라며 훈련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사람은 피하거나 빠져나갈 구멍 찾는데, 별 미친놈 다 봤다며 격려했다. 월요일부터 유격훈련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받았다.
무척 인상적이었고 고마웠기에 잊은 적이 없다. 쉽사리 연락이 닿지 않았다. 오늘에야 소식 듣고 전화 통화를 한다.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기로 했다. 죄가 크다는 생각이다. 후한서에 전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가난하고 천할 때의 사귐을 잊으면 안 되고, 술지게미와 쌀겨가루를 먹으며 가난을 함께 한 아내는 내보내선 안 된다. 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
중국 후한의 광무제(光武帝)는 송홍(宋弘)이라는 신하를 매우 신뢰하였다. 유능하고 청렴결백하였기 때문이다. 딸인 호양공주가 남편을 잃고 홀로되자, 송홍을 사위로 삼으려 했다. 광무제가 송홍에게 말했다. "고귀한 사람은 남과 사귀기 쉽고, 부유한 여자는 누구든지 데려가려 한다는데, 그대는 어떠한가?" 이에 송홍이 답한 말이 상기한 내용이다. 권력보다 신의를 더 소중히 여겼다. 이에 광무제는 송홍이 부인을 버리고, 공주 받아들일 의사가 전혀 없음을 알고 포기한다.
유사한 야담은 많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한다. 어려울 때 사람을 알아본다고도 한다. 강한 바람이 불어야 뿌리 깊은 나무를 안다(疾風知勁草). 좋은 벗을 찾기보다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먼저이다. 구원자를 만난 것 같았던 그 마음을 너무 소홀히 했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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