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행복, 한 짐에, 묻어온 아픔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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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행복, 한 짐에, 묻어온 아픔 한 조각

  • 승인 2022-06-10 10:19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2월 중순경 밤 8시쯤 된 시각에 전화가 왔다. 받아 보니 70년대 초임지 학교 제자 L ○○○수녀였다. 여러 해 동안 소식 몰라 궁금했었는데 반갑기 이를 데 없었다. 공인으로 바쁜 몸이 내 근황이 궁금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가운데 수녀제자가 몇 년 동안 아파서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고(病苦)에 시달린 성직생활이 엄청 고생이 많았던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아팠다.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을 무겁게 했다. 옛날 생각도 나고 보고픈 마음에 3월 중으로 날짜를 잡아 삼척에 가기로 했다.

제자는 현재 수녀이지만 내 초임지 고등학교 재학 시절엔 나를 따르고 좋아했던 청순한 여고생이었다. 어느 면으로 보나 나무랄 데 없는 학생이었고 고아원서 학교를 다녔기에 마음으로 아끼는 제자였다. 고 3때 상담을 했는데 앞으로 수녀가 되겠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가고자 하는 길이 잘못 된 것은 아니지만 보통 사람으로서는 힘들고 어려운 길이니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며칠 후에 감화 설득을 시키려고 재차 상담을 했으나 수녀가 되려는 결심은 이미 굳어진 것 같았다. 평생 걸어야 할 인고의 길이라 보통 결심과 인내로써는 감내하기 어려운 삶이니 숙고해 보라고 재차 당부를 했다. 하지만 결과는 고집을 꺾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학교 이동 전보 발령으로 대전여고로 가게 되었다.



1977년 8월 삼복더위에 제자가 대전여고로 찾아왔다. 찾아온 사유를 물었더니 정릉 수녀원으로 교육을 받으러 가는 길인데 인사라도 드리고 가야 될 것 같아 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렵게 말을 꺼냈다. 수녀가 되는 길을 포기할 수 없겠느냐고 했다.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담화를 나누는데 그늘이라도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플라타너스 그늘은 엄청 시원했지만 작심한 제자의 뜻을 꺾지 못하고 보내는 마음은 열이 식을 줄을 몰랐다.

그 후 세월은 흘러 제자는 수녀가 돼 대전 유천동 성당으로 오게 되었다. 그래 자주는 아니었지만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뜸한 시간이었지만 어쩌다 시간을 내어 대화도 나누고 식사라도 같이 할 수 있었을 때는 특별한 행복을 하늘이 내려 주시는 느낌이었다.

한 번은 동학사 산책길을 걷고 싶다기에 어렵게 시간을 내어 동학사 남매탑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그 흔한 등산모 하나 쓰지 못하고 신사복 차림에. 제자는 까만 수녀복 차림으로 동학사 남매탑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남매탑을 향해 가고 있는 둘의 모습이 무슨 스타 배우로 보였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동물원의 희귀 동물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사람들 시선이 우리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인기 유명배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걷는 기분이었다.

주목받고 있는 남녀 두 사람!

하나는 수녀복 차림의 앳된 제자, 다른 한 쪽은 연인으로 의심받을 수녀의 고교시절 선생님!

아마도 드라마 속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이런 수녀와의 아름다운 만남이, 수녀가 부산성당에 있었을 때도, 타지에 있었을 때도 몇 번 있었다.

전화를 받고 생각했다. 삼척 호산 공소가 아무리 멀어도 그 동안 병고로 시달린 제자수녀를 만나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삼척을 가기로 마음 굳히고 떠나기 1주일 전에 전화를 했다. 내가 삼척까지 가면 호산공소에서 1시간 거리 버스를 타고 나와 기다리겠다고 약속을 했다.

견우직녀가 만난 장소는 은하수의 오작교였지만 우리의 오작교는 삼척이었다.

약속 날짜가 돌아왔다. 망팔(望八)을 갓 지난 나이였지만 젊었을 때 설레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우등 고속버스가 열심히 달렸지만 4시간 40분이나 걸려 삼척에 도착했다. 내려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자가 전화를 해서 쉽게 만났다. 이산가족 상봉과도 같은 기쁨이었다. 사제지간의 만남, 그것도 수녀와 새속인과의 만남이었지만 기쁨과 행복감은 연인 사이의 만남과 다를 게 없었다.

가는 길이 다른 두 사람!

하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성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수녀,

또 다른 하나는 속인으로 살고 있는 천주교 신자로서의 범부인 그 스승.

허나, 만나는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로 통하고 있었다.

상봉 시간이 마침 점심때가 다된 시각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질 못하는 완벽주의자여서 그런지 소문난 맛집 음식점에 예약까지 해 놓았다. 예약된 음식점으로 갔다. 해물 찜 식사 자리는 행복하기 그지 없었다.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통하는 자리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점심 식사 자리는 옛날의 향수를 반추하는 자리로도 부족함이 없을 듯했다. 불원천리 달려가 겸상으로 마주한 자리 너무나 좋았다. 사제지간에 소박한 정을 나누는 자리였지만 행복감이 넘치고 있었다. 연인끼리 마주 앉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오붓한 시간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제자가 제안을 했다. 전경이 좋은 명소가 있으니 안내하겠다고 했다. 가 보니 탁 트인 동해의 넘실대는 바닷물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름 있는 건물의 전망대였다. 가슴까지 뻥 뚫리는 상쾌함이었다. 다양한 풍치 조망을 끝내고 동해 해변 백사장을 걷자고 했다. 말만 들어도 낭만이 묻어나올 것 같은,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백사장을 여한 없이 걸었다. 아담과 이브가 천상낙원에서 즐기는 기분이었다. 행복이란 이런 것을 일러 하는 말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번엔 내가 제안을 했다. 수녀복 위에 걸치고 나온 칙칙한 색깔의 외투가 너무 초라하고 춥게 보였다.

측은지심에 옷 한 가지라도 사 입히고 싶어 매장에 가자고 했다. 예상은 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한 제자인지라 다른 제안을 했다. 마침 주변에 대형매장이 눈에 띄어 집에서 먹을 과일과 채소 쇼핑을 하자고 했다. 진심에서 나온 호의를 두 번씩이나 거절하기가 미안했던지 이 번은 져 주는 것이었다. 나는 쇼핑 카트를 밀고, 수녀제자는 필요한 물건을 골라 담고 있었다.

수녀제자는 한 달치 먹을 것을 카트에 실어 담았다는 말을 하면서도 미안해하는 얼굴빛이 역력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쇼핑 장면은 잉꼬부부의 생활 단면을 연출한 느낌이었다. 돈을 쓰면서도 행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쇼핑 마치고 공소에 가서 참례(參禮) 인사를 드리고, 금남의 지역이라는 제자수녀의 숙소로 향했다.

선생님이라는 특별 배려로 금남의 지역에 들어가 차 한 잔 대접을 받았다.

금남의 집은 한 평 남짓할 것 같은 거실 공간 한 편엔 주방 싱크대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몇 십 년 전부터 쓰던 재봉틀 한 대가 버티고 서 있었다. 바쁜 공인생활 중에도 틈만 있으면 박고, 꿰매고, 한 행주치마를, 손수건을, 수선한 옷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일했던 기계임에 틀림없었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손수 만들어 갖다주는, 베풀고 살았던, 재봉틀임에 틀림없었다. 말하자면 사랑을 만들고 분배하는 기계였다. 나도, 남도, 못하는 일을 하고 사는 수녀제자가 존경스러웠다. 고개가 숙여졌다.

마침 숙박업을 하는 성당 교우가 있어 숙소 예약을 해 놓았다기에 숙소로 발길을 재촉했다.

특별한 부탁을 해 놓아서인지, 방을 따뜻하게 덥혀 놓는 배려까지 얹혀 있었다.

따뜻한 난방 덕분이었는지 피곤을 느끼는 여독을 말끔히 걷어내게 되었다.

조반은 사 먹을 데가 없으니 아침은 느즈막 시각에 먹는 아침, 점심을 겸한 아점으로 하자고 했다.

기상하여 해안가 <임원 남화산 해맞이 공원>에 올라가 산책을 했다. 거기엔 헌화가에 나오는 수로부인의 동상이 호감을 갖게 하는 모습으로 눈길을 끌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다 돼 버스를 타고 제자수녀가 준비해놓은 아점을 먹기 위해 공소의 수녀 숙소로 향했다 .

정성과 사랑이 배어 있는 아점이 나왔다. 새우 볶은밥에 신선한 채소 과일로 만든 샐러드, 게다가 이름도 모를 영양식 피자파이를 방불케 하는 음식도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진수성찬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음식도 맛있었지만 느끼는 자의 행복감, 즐거움은 지상천국의 최고 선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쉬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등에 지고 간 등산용 가방을 풀었다. 마음먹고 찾아온 길이었기에 고민 끝에 마련한 미사용 대초 두 자루와 소박한 마음을 담은 봉투 하나를 살며시 놓고 나왔다.

예매해 놓은 차표를 원망하는 심정이었지만 대전행 고속버스를 타야만 했다. 작년 5월 말에 제자수녀가 직접 만든 매실효소 한 병, 그 소중한 것이 가방 속에서 수녀의 선생님을 울리고 있었다.

불원천리(不遠千里)의 또 다른 오작교 - 삼척은 나를 즐겁게도 마음 아프게도 했다.

만나고, 끼니를 함께하고, 카트 밀어 쇼핑하고, 백사장 거닌 모든 시간들은 즐거움과 행복을 수놓는 시간이었다.

헌데, 주름살에 병고로 시달린 제자수녀의 초췌한 모습은 왜 이리 사람의 마음을 쥐어뜯는지 모르겠다.

행복, 한 짐에, 묻어온 아픔 한 조각

견우직녀가 만난 오작교는 즐거움, 기쁨만 있는 다리였을 텐데

또 다른 오작교 - 삼척의 다리는 왜 이리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이순(耳順)을 멀리한 얼굴의 검버섯과 주름살은 왜 이리 마음을 쥐어뜯는 아픔인지 모르겠다.

이런 아픔이 올 줄 알았다면 오작교 삼척은 가지도 말았을 것을,

아니, 방년(芳年)의 젊음만을 훔쳐다가 방부제 처리해 두었을 것을…….

솔향 남상선 /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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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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