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
2022년 5월 15일은 제41회 스승의 날이다. 스승의 날은 교사와 교수의 노고에 감사하는 취지로 만들어진 날인데 학교 폭력과 촌지 논란으로 여러 가지 규제가 많아 교사와 교수조차 불편해하는 날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요즈음은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해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조되고 있어 스승의 날 행사도 비대면으로 개최되는 바람에 평소 존경하는 스승을 찾아뵙고 감사의 말씀을 올리기도 부담스럽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는 스승의 날 기념식에서 교육공로자에게 포상하고 수상자에게 국내외 산업시찰 기회를 주었다. 또한, 각급 학교 동창회·여성단체·사회단체가 자율적으로 사은 행사를 하는데, 특히 '옛 스승 찾아뵙기 운동'을 전개하여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고 사제관계를 깊게 하는 한편, 은퇴한 스승 중 병고와 생활고 등에 시달리는 이들을 찾아 위로하기도 했다.선후배 및 재학생들은 옛 은사와 스승을 모시고 '은사의 밤'을 열어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며, 스승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드렸다. 또한, 스승의 역할에 대한 특별강연·좌담회·다과회 등도 개최했다.
1. 한국의 존경받는 스승
요즘 '학교에 교사는 있어도 스승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존경받는 스승이 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교사에 대한 신뢰, 나아가 존경심은 교육의 효과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뢰와 존중은 필요하다. 학부모와 사회가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교실에서 선생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교육의 성과가 낮아져 사회 기반이 약화될 것이다.
교육부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스승을 존경하는 풍토를 조성하고자 2014년 10∼11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온라인으로 훌륭한 스승을 추천 받았고, 교육·역사학계 인사들로 '이달의 스승' 선정위원회를 구성하고 교사로서 활동 여부 · 교육 발전 공헌도, 교육 현장의 긍정적 효과 등을 기준으로 심사하여 동년 12월 16일 '이달의 스승' 12명을 선정했다.
(왼쪽부터) 도산 안창호 선생, 남강 이승훈 선생, 포암 이백하 선생 |
'이달의 스승'에는 백농(白?) 최규동(崔奎東, 1882∼1950), 도산(島山) 안창호(安昌鎬, 1878~1938),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983~1950), 최용신(崔容信, 1909~1935), 주시경(周時經, 1876~1914),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 1863~1939), 김필례(金弼禮, 1891~1983),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 1868~1942), 해원(海圓) 황의돈(黃義敦, 1887~1964), 천원(天園) 오천석(吳天錫, 1901~1987), 김교신(金敎臣, 1901~1945), 이시열(李時說, 1892~1980) 선생 등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백농(白?) 최규동은 뒤늦게 친일 활동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한국의 존경받는 스승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충청도 출신의 스승은 단 한 분도 추천받지 못해 충청도 스승들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했다.
그리하여 제41회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한국의 존경받는 스승으로 충남 천안 출신의 포암 이백하 선생을 새로 추천하여 그분의 생애와 업적과 사상을 고찰하고 기려 충청도 스승들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에 일조하고자 한다.
2. 포암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1) 구한말 충남 천안에서 출생
포암(逋巖) 이백하(李栢夏) 선생은 구한말인 1899년 4월 17일에 충청남도 천안시 성남면 석곡리 목골 43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의 덕천군파(德泉君派) 17세 손으로 심재(審齋) 이건표(李建標)와 박노희(朴魯姬) 사이의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조부인 어당(?堂) 이상수(李象秀, 1820-1882) 선생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로 시문과 교육방법론에 능한 조선시대 말의 대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리하여 이백하 선생은 조부의 유지를 이어받아 일평생 항일독립운동과 초중등교육에 헌신하다가 1985년 2월 16일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고 한다.
2) 독학으로 한국학과 한의학에 정통함
그는 10여 세에 한시를 지었을 만큼 총명했으나 집안이 가난해 정규 교육은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했지만, 부친인 심재(審齋) 선생이 운영하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독학으로 한의학과 문학에 정진하여 박식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문장력이 뛰어나 시도 수십 편을 창작했고, 역사학에도 관심이 많아 동양사와 한국사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팔만대장경을 해독할 정도로 불교학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3)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기초
기미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파고다(탑골)공원에서 항일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진 것을 계기로 하여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퍼져나가자 그의 가슴 속에는 항일 애국심이 활활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천직인 오송보통학교 교사직마저 미련 없이 사직하고 고향인 성남면 석곡리 목골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면서 성남면의 유림(儒林) 대표로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는 먼저 동지들의 의견을 모아 종합적인 거사계획을 세우고, 유관순(柳寬順) 열사가 서울에서 은밀히 몸에 숨겨 가지고 온 파고다(탑골)공원에서 선언된 독립선언서가 어려운 한자로 기록되어 있어 난해하고 너무 길어 지루하므로, 그것을 참고해 326자의 쉬운 한글로 기록된 아우내 장터 독립선언서를 구국동지회 명의로 초안하고 미농지(美濃紙)에 철야 복사해 배포했다.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2천만의 민족이 있고 3천 리의 강토가 있고 5천 년의 역사와 언어가 뚜렷한 우리는 민족자결주의를 기다리지 않고 원래 독립국임을 선포하노라. 민족의 대표 33인이 선봉이 되었으니 13도 2천만 민중은 뒤를 이어 때를 잃지 말고 궐기하라. 분투하라. 인도 정의의 두 주먹으로 잔인무도한 일본의 총칼을 부수라. 정의의 칼날 앞에는 간악한 창과 방패가 굴복할 것이다. 하늘은 의로운 무리를 도울 것이며 귀신은 반드시 극악무도한 자를 멸할 것이니 동포여 염려할 것 없고 주저할 것 없이 오늘 정오를 기하여 병천 시장에 번득이는 태극기를 따르라. 모이라. 잃었던 국토를 다시 찾자. 기회를 놓지면 모든 복도 가느니 두 주먹을 힘차게 쥐고 화살같이 모이라. 반만년의 문화민족이 노예시 야만시하는 일본의 굴욕을 감수할 것이랴. <기미년 4월 1일 구국동지회 대표 일동>
이 독립선언서는 326자에 불과해 짧지만 거사에 주민들을 많이 동원하기 위해 선동적인 언어가 많이 기술되어 있고, 우리 한민족의 굳건한 항일독립의지와 기개가 실감나게 잘 나타나 있다.
최근 필자가 3.1운동을 전문적으로 조사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2017년 3월 31일 현재까지 기미년 3.1운동 당시 지방에서 독립선언서를 자체 기초해 선언한 것으로 밝혀진 곳은 경상남도의 함안(咸安)과 하동(河東)을 비롯해 서너 곳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기미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선언된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는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사상 아주 드문 사례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클 뿐만 아니라 지역의 정체성(正體性,identity)을 밝히는 데에 아주 중요한 향토 사료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김구응(金球應), 조인원(趙仁元), 유중무(柳重武), 김교선(金敎善), 한동규(韓童圭), 이순구(李旬求), 유관순(柳寬順) 등과 함께 기미년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호서지방 최대의 항일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 특히 그는 혈기왕성하고 애국심이 강한 유관순 열사와 함께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결국은 일제에 검거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4) 해방 후 충주중과 청주고에서 수많은 훌륭한 제자 양성
해방 직후 그는 교사로 초빙을 받아 충북과 서울의 중등학교에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면서 항일독립사상 고취는 물론 주체의식 함양에 진력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충북의 명문교인 충주중, 청주고, 청주여중에서 15년 동안 재직하면서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양성했다고 한다.
충주중 재직 시에 배출한 제자로는 문학평론가 유종호(柳宗鎬, 84세), 17대 충주시장과 충북 부지사를 역임한 홍순기(洪舜基, 90세) 등을 들 수 있다. 청주고 재직 시에 배출한 제자로는 내무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역임한 김종호(金宗鎬, 1935-2018), 농수산부장관과 정부 장관을 역임한 정종택(鄭宗澤, 86세), 14대 충주시장을 역임한 이상용(李相龍),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문학평론가 홍기삼(洪起三, 81세) 등을 들 수 있다.
(왼쪽부터) 1960년 12월 준공한 청주고 원탑 교사(校舍)와 교지인'문봉(文峰)'의 겉표지와 교모·책가방 사진 |
포암 이백하 선생이 청주고 재직시절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국어 수업을 하는 모습 |
또한 그는 1955년 2월 7일에 중학교 교감 자격증을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어 평교사로 정년 퇴임을 하고,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촌지나 선물을 절대로 받지 않았는가 하면, 내신 성적 조작을 홀로 거부한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올바른 교육자의 길을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그는 다년간 국어와 한문 교사로 재직해서 그런지 평소에 말을 아껴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살아 실수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자기 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면서 규칙적인 생활과 청결과 근검절약을 생활화하여 타에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불심이 강해 팔만대장경을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불경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청주시 상당구 수동의 우암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용화사의 법회에 참여하여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설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가끔 청주고 동문들이 모이면 이백하 선생에 얽힌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학창시절의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고 한다.
아무튼 포암(逋巖) 이백하(李栢夏) 선생은 명문대가에서 태어나 일평생 항일독립만세운동과 초중등교육에 헌신하다가 1985년에 87세를 일기로 타계했고, 그의 유해는 지금 대전 국립묘지에 묻혀있다. 특히 그는 아우내 장터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면서 구국동지회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배포하여 3.1독립만세운동의 지역화(localization)를 기하여 우리나라의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불후의 업적을 남김으로써 1990년 12월 26일에 국민훈장 애족장 제1862호를 수여 받았다고 한다.
5) 포암 이백하 선생에 대한 평가
포암 이백하 선생은 일평생 조부인 오당(堂) 이상수(李象秀) 선생을 중요한 타자(significant others)로 인식하고 살았는데, 그의 재주와 업적이 오당 선생에 미치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포암 이백하 선생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는 오송보통학교에 근무하다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기미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해방 후에는 충북의 충주중·청주고·청주여중·서울 문영여중 등 중등학교에서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여 우리 조국이 후진국에서 중진국을 거쳐 선진국으로 발전하는 데에 많은 이바지로 걸출한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화여대와 연세대에서 석좌교수를 역임했던 문학평론가 유종호(柳宗鎬, 72세) 교수는 자기 저서인『나의 해방 전후』(민음사, 2004.8)에서 충주중학교 1학년 재학 때 은사였던 이백하 선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 바 있다고 한다.
"이백하 선생은 인품으로나 실력으로나 단연 돋보이는 교사였다. 서당에서의 한문 수학이 유일한 학력이란 점도 이채로웠다. 독립운동의 전력 탓도 있었겠지만, 선생은 우리말과 역사를 기회 있을 때마다 열의 있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는 또 지난 1985년 2월 16일 이백하 선생이 노환으로 87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충청일보의 글 청탁을 받고 다음과 같이 추도사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이백하 선생의 작고에서 나는 한 시대의 종언을 느꼈다. 좋았던 옛날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황량한 세월이었으되 선생 같은 분이 계심으로 해서 그리움의 녹지를 간직하고 있는 한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청주고 31회 졸업생으로 동국대 국문과를 거쳐 일본 쓰쿠바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문학평론가인 홍기삼(洪起三, 83세) 선배는 "이백하 선생은 키는 비교적 작은 편이었고, 항상 단정한 옷차림으로 교단에 서 있었다. 국어를 가르쳤는데, 말수가 적어 실수를 거의 하지 않았다. 문학적 소양이 풍부해 현대문학과 고전문학을 넘나들며 해박한 강의를 하고, 어휘를 한문과 외국어로도 풀이해 주었으며, 한국사와 중국사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다. 한자와 한문은 물론 영어에도 능통해 아주 실력 있고 인상 깊은 교사로 명성이 자자했고, 학생들 사이에는 '백과사전(百科辭典)'으로 통했다"고 말했다.
청주고 33회 졸업생으로 고려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한국기계연구원 감사를 역임한 붕촌(朋村) 이명종(李明鍾, 81세) 선배는 "포암 이백하 선생은 박식하고 점잖은 스승으로 정분이 넘치도록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잘 지도해 주셔서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잊히지 않고 뇌리에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포암 이백하 선생은 충청지역의 항일독립운동과 중등 교육계에서 많은 업적을 남김으로써 제자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교육자이자 애국지사다.
그러나 아직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원본을 찾지 못해, 그가 한국의 항일독립운동사에 남긴 위대한 업적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6)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원본 찾기 운동 전개... 아우내장터와 청주고 교정에 이백하 기념비 건립해야
우선 먼저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103주년을 계기로 하여 전국적으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원본 찾기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원본을 반드시 찾아내서 이백하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2008년 5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천안시 병천면 병천리 288번지 일원에 4,430㎡ 규모로 조성해 놓은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과 청주고 교정에 그가 기초한 아우내 장터 독립선언서 전문을 새겨 넣은 이백하 선생의 기념비를 건립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여 침체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데에 이바지해야 한다. 또한 포암 이백하 선생 기념사업회를 하루라도 빨리 출범시켜 '포암 이백하 평전'을 발간하고 그분의 생애와 업적을 체계적으로 기리고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지역과 국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