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 : 到(거꾸로 도) 整(가지런할 정) 累(쌓을 누) 卵:알 란)
출 전 : 선조실록(宣祖實錄) 한국인의 인간상(韓國人의 人間像)
비 유 : 스승의 위대함. 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해 낼 때를 비유함.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과거, 현재 할 것 없이 언제나 스승은 우리의 삶에서 존경(尊敬)의 대상이었고, 잊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자고(自古)로 나라가 창업(創業)되면 그 나라에 중심이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임금(君/국가지도자), 스승(師/사회지도자), 부모(父母/가정책임자)가 국가의 정신적 중심이 되었다. 곧 이를 이른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표현하고 있다.
조선 14대 선조(宣祖) 때 사명당(四溟堂 /惟政.유정.1544~1610)이 오랫동안 금강산(金剛山) 등지에서 도(道)를 닦은 끝에 축지법(縮地法)까지 익히자 혼자 생각했다.
'묘향산(妙香山)에 도술 높은 서산대사(西山大師 /休靜.휴정1520~1604) 라는 큰 스님이 계시다는데 그와 도력(道力)을 한번 겨뤄 봐야겠다. 그래서 만약 나의 도력이 모자라면 그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도를 더 닦아야지.'
사명당은 이제 막 익힌 축지법을 이용하여 몇 걸음 만에 묘향산 입구에 도착했다.
한편 서산대사는 사명당이 올 줄을 미리 알고 묘향산 골짜기의 물을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흐르게 해 놓았다. 도착하여 이 광경을 본 사명당은 큰 감동을 받았다. "역시 도술이 뛰어난 스님이시군!" 이윽고 암자에 도착한 사명당은 새 한 마리를 잡아 가지고 손에 쥐고서 서산대사 앞에 가서 물었다.
"대사님, 제가 이 새를 죽이겠습니까? 살리겠습니까?" 그러자 서산대사는 사명당을 맞으려 대문을 나오려다 대문 문지방에 다리를 앞뒤로 걸치고 서서 되물었다.
"대사, 그럼 내가 지금 밖으로 나갈 것인지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맞혀 보시오. 그러면 나도 맞히리다."
사명당은 "그거야 나오시든지 들어가시든지 대사님의 마음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허나 대사님은 저를 맞으러 나오시는 길이니까 아마 나오시리라 생각합니다."
서산대사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신 역시 손 안의 새를 죽이든 살리든 당신 마음이 아니겠소. 그러나 대사가 살아있는 목숨을 죽이지는 않을 것으로 아오."
사명당은 "맞습니다. 불자(佛子)가 귀한 생명을 죽일 수는 없지요. 허허허."
사명당은 시원스럽게 웃고 나서 손안의 새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 두 분 대사는 마루방에 마주 앉았다.
사명당은 냉수 한 그릇을 청한 뒤 그 물에 가지고 온 바늘 백 쌈을 쏟았다. 그러자 바늘이 곧 먹음직스런 국수로 변했다. 그리고 사명당은 그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그러자 서산대사는 "그 국수 맛이 참 좋을 것 같구려, 나도 출출하니……." 하면서 종자에게 냉수 한 사발과 바늘 백 쌈을 가져오도록 하고, 사명당과 똑 같이 바늘을 국수로 만들어 후루룩 마셔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국수를 뱉으니 국수가 다시 바늘 백 쌈으로 변했다.
이를 보고 속으로 놀란 사명당은 2차전으로 준비해 온 달걀꾸러미에 달걀을 꺼내어 차례차례 괴어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산대사가 "대사의 도력이 참으로 놀랍구려" 하면서 서산대사도 달걀을 가져오도록 하더니 처음 한 개를 허공에 머물게 한 다음 그 아래쪽으로 연이어 받쳐 내려가면서 거꾸로 쌓는 것이었다.
분명히 서산대사의 재주가 더 뛰어났다. 더욱 놀란 사명당은 3차전으로 이번에야말로 하면서 오른손을 들자 하늘에 구름이 모여들어 금새 소나기가 쏟아졌다. 서산대사는 "대사의 도력도 참으로 놀랍군요. 허허허……." 말을 마친 서산대사는 손을 들어 내리는 빗줄기를 거꾸로 하늘로 솟아오르게 했다. 땅에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지지 않게 만든 것이다.
3차전마저도 사명당이 진 셈이다. "대사님, 제가 졌습니다. 이제부터 대사님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사명당은 큰절을 하고는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스승의 어원에는 두 가지 설(說)이 있다. 무당을 나타내는 '무격'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중을 나타내는 '사승(師僧)'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스승은 원래 중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불교의 중을 '스승(師)'이라고 기록하였다. 옛날에는 중을 존경해서 부를 때 '사승(師僧)' 혹은 '사(師)님'이라는 호칭을 썼던 것이다.
한편 동언교략(東言巧略)에 사(師)의 중국 발음이 '스'란 점으로 미루어 사승(師僧)이 스승의 어원이라 했다. 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또한, 동일한 뜻으로 쓰이는 선생(先生)이란 말은 고려(高麗) 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었다. 조선조 중엽 때 문헌인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당시 선비들이 술 마시며 글 짓는 문주회(文酒會)에서 벼슬이 높거나 낮건 간에 서로 '선생'이라 호칭을 하였다. '비록 벼슬이 높은 귀인일지라도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그저 대인이라 부르는 것이 고려 때부터의 법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튼 선생을 높이기 기리기 위하여 제정된 '스승의 날'이 현재는 5월 15일이다.
우리나라의 '스승의 날' 유래는 1958년 충남 강경여자 중·고등학교의 청소년적십자에서 시작되었다.
윤석란을 비롯한 단원들은 병환 중에 계신 선생님 위문과 퇴직하신 스승님께 위로활동을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63년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 처음으로 5월 26일을 '은사의 날'로 정하였다. 그리고 1965년에는 겨레의 위대한 스승이신 세종대왕(世宗大王)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다시 정하고 기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즈음 스승들의 처지가 매우 낮아졌다.
스승이야 말로 사회의 정신적 지주(支柱)로서 존경받고 그 은혜에 감사해야한다.
하루 빨리 교권(敎權)이 확립되고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이 새로워져 어둡고 혼탁한 세상을 밝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스승을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풍속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장상현 / 인문학 교수
장상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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