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에게 '객관적인' 공정은 가능한 것일까. 교육만 하더라도 강남 환경과 시골 환경이 다르듯, 기본적으로 그런 공간을 벗어날 '자유'가 없다면 그런 공정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간극을 최소화하여 실천적인 공정의 실마리를 제시한 인물이 독일의 야콥 푸거다.
푸거는 신구 종교 갈등이 첨예하던 시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챙겨 독일을 넘어 유럽 최고의 부자반열에 오른 상인이었다. 그렇게 긁어모은 돈으로 그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1521년 '고품격' 소셜 타운 '푸거라이'를 세웠다.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은 당시에는 너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시의 설립 증서에는 푸거라이 수혜자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가난한 가톨릭 시민이어야 했다. 1523년까지 첫 6개 거리에 52채의 연립주택이 지어졌다. 현재는 67채의 가옥과 140채의 연립주택이 들어섰다.
1521년 당시의 임대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연간 1라인 굴덴(현재 0.88유로 정도)과 하루 3번 푸거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임차인이 관리비 등 추가 비용을 부담하는 게 전부다. 20세기까지 푸거라이는 다자녀 가족도 많이 받아들였다. 푸거라이의 기본 취지는 빈곤의 위협에 처한 일용직과 수공업자를 위한 것이었다. 권장사항은 입주민들 간의 우호증진과 상호협력이었다. 이를테면 정원 손질, 수리 돕기, 야간 경비, 박물관 돌봄 등으로 지역 사회에 각자의 역량을 기부하는 식이다.
푸거의 푸거라이 개념은 16세기에 급진적이었다. 이 당시는 가계가 기울어지면 대개는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였다. 남편과 부인은 따로 강제노동시설에 가고, 아이들은 고아원에 보내지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푸거는 이들이 함께 머물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자립과 회생을 위한 역량 개발의 지름길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푸거라이에는 주택단지 추가 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박물관과 기념품 가게, 자체 학교와 교회도 이 '도심 속의 마을'에 추가되었다. 오늘날 푸거라이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자 사회주택을 위한 벤치마킹의 표본으로 떠올랐다.
1943년에는 입주민 보호를 위해 푸거라이의 정원에 공습 대피소도 마련되었다. 1944년 2월 25~26일 영국군의 아우크스부르크 야간공습으로 정착촌의 3분의 2가 파괴되었지만, 1945년부터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전후에 수많은 전쟁미망인과 여성들도 이곳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지금은 은퇴자, 편부모뿐 아니라 이민자도 이 커뮤니티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500주년 기념에 즈음하여 세계와 미래를 고려할 때 푸거라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느냐는 치열한 담론이 있었다. 그 결론은, 세속적이든 종교적이든, 사적이든 공적이든, 세계와 미래의 푸거라이는 지역 사회 지향적이고 지속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푸거라이는 기업의 사회적 환원(CSR)의 획기적이고 모범적인 사례임이 분명하다. CSR이 대개는 기업이나 조직의 여건에 맞는 서비스 활동에 국한되고 있다면, 푸거라이는 지속 가능한 고품격 '사회주택'을 통해 사회 취약계층에게 자립과 회생을 위한 공간에 투자했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새 정부와 함께 세상이 '공정하다는 착각'을 직시하고 취약 계층도 환경적으로 공정한 출발과 과정을 누릴 수 있는 대전 친화형 '푸거라이'가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는 지역사회 발전의 또 다른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성만 배재대 항공서비스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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