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립박물관은 대전의 역사와 문화를 모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1990년 향토사료관으로 출발했고 2012년 역사박물관과 선사박물관으로 분리해 2017년 운영 조례 개정으로 대전시립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2019년 시립박물관과 선사박물관, 근현대사전시관 3관 체제로 운영을 시작했다. 대전시립박물관에는 2022년 3월 기준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총 9796점, 선사시대부터 조선은 물론 근현대 역사 유물이 총집합돼 있다. 이 가운데 주요 유물 15점을 선정했다. 대전시립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세 차례에 나눠 소개한다. <편집자 주>
대전시립박물관이 소장한 쌍단지는 백제시대의 것으로 두개의 단지 몸통이 연결돼 있다. 출토 당시에는 한쪽의 호가 반파되어 유실됐으나 2011년 보존처리해 복원했다. 전국에서도 5점 밖에 출토되지 않은 특이한 토기 형태다. 사진=대전시립박물관 |
출토 당시 쌍호 중 한쪽의 호(壺)가 반파돼 토기편이 유실된 상태였으나 2011년 보존처리를 통해 완형으로 복원했다. 이 단지는 용산동·탑립동 이외에 1998년 조사된 용산동 1점(충남대학교박물관 소장), 서울 석촌동 고분군 1점, 몽촌토성 2점(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을 포함해 지금까지 5점밖에 출토되지 않은 특이한 토기다. 특히 한성 백제의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서울과 대전에서만 확인되고 단지의 형태도 매우 유사해 백제 중앙문물의 지방 파급 양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성수침 필적은 보물로 지정된 유물이다. 청송 성수침은 16세기를 대표하는 도학자로 조선시대 조선 성리학 초기의 대표 인물이기도 하다. 비교적 큰 글씨로 쓰인 필적은 원본글씨를 잘라 장첩한 것이다. 사진=대전시립박물관 |
명필로도 이름 높았으나 필적은 드문 편이다. 이 첩의 성수침 글씨는 남겨진 다른 필적에 비해 비교적 큰 글씨이며 담묵을 즐겼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첩 안에는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의 아버지 송요좌(宋堯佐, 1678~1723)의 '청은당(淸隱堂)'이란 장서인이 있다. 표제는 『청송서(聽松書)』이고, 원본글씨를 줄[行]에 따라 잘라 장첩한 것이다.
연지계회도는 1629년 숭례문 앞 홍사효에서 열렸던 기로회를 기념해 그려진 계회도다. 사진=대전시립박물관 |
박회수의 초상으로 기타 유물에 비해 근대의 유물이다. 조선후기 도입된 서양화법의 영향으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이 드러난다. 사진=대전시립박물관 |
이 그림은 박회수의 정면 반신상이다. 사모를 쓰고 밝은색 단령을 입고 각대(角帶)를 두르고 있다. 조선 후기 도입된 서양화법의 영향으로 초상화에서도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한지와 비단 등 전통 재료와 안료를 사용했으며 선묘가 주를 이루는 전통 기법 안에서 혼합된 방식으로 그려졌다.
반면 유화와 같이 광택이 있으며 배경이 비치지 않는 불투명한 안료로 그려졌다는 점, 마치 사진과 같이 얼굴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점, 선적 표현이 거의 보이지 않고 면적 묘사가 주를 이룬다는 점 등 서양화의 특징을 띄고 있다. 우리나라 서양화 전래시기를 재고해볼 수 있는 자료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양쪽에 문이 달린 나무로 만들어진 감실 안에 초상화를 안치해 제의(祭儀) 목적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산구곡도는 현재 대전시립박물관 특별전에서 만날 수 있다. 율곡 이이가 은거했던 황해도 해주 고산 석담의 풍경을 그렸다. 사진=대전시립박물관 |
이 그림은 역행법을 사용해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전개되며 4장의 지본을 붙여서 두루마리식으로 만들었다. 상단에는 이이의 한글시, 송시열의 차운시, 김수증의 고산구곡가를 순서대로 적었고 시를 지은 사람 이름과 각 곡의 주요 경물 명칭을 주서(朱書)로 적었다. 소략한 필치이지만 산세는 엷은 담묵으로 채색해 청량하다. 전체적으로 구성이 느슨하지만 경물의 요점만을 나타내 간략하면서 소박한 선묘를 보인다.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판각한 〈고산구곡도〉와 거의 유사한 도상과 필법을 지니고 있어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산구곡도는 율곡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 노론계 문사들이 주로 제작·배포해 정통성을 강조하고 도모하는데 사용했다. 본래 중국의 무이구곡도에서 유래된 것인데, 성리학자들의 이념적 이상향을 그린 것으로 조선에서 고산구곡도 등으로 새롭게 정착했다.
정리=이해미 기자 ham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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