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열 수필가. |
대전은 물과 인연이 많은 도시다. 우리나라 물을 통합 운영·관리하는 한국수자원공사 본사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세 물이 만난다는 삼천동이나 물이 통한다는 뜻을 지닌 '계룡산 수통골'은 그 얼마나 독특한 이름인가. 대전은 물이 가져다주는 이점을 최대한 누리고 있어도 물이 귀한 도시다.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볼 때는 근원까지 깊이 살펴야 한다. 대전 시내를 흐르는 주요 하천은 갑천, 유등천, 대전천이다. 이 하천들은 유역면적이 적고 수로의 길이가 짧아 홍수 때만 잠시 범람했다가 금방 물이 빠져버린다. 평상시 흐르는 수량은 적고 하천 폭은 넓어서 수심이 얕다. 대전의 인구 150여만 명이 이 하천들에 기대어 먹고살 수 없다.
금강이 대전을 휘감아 돌아가는 곳에 대청댐이 있다. 그곳에서 풍부한 물을 끌어와 가뭄 걱정 없이 금강의 너른 품에 안겨 생명의 젖을 먹고 있다. 그러니 갑천과 그 지류인 진잠천, 유성천, 반석천, 탄동천, 유등천, 그리고 대전천과 그 지류인 대동천은 시민들의 휴식과 운동을 위한 친수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도솔산과 옥녀봉 사이를 지나 유림공원에 이르는 갑천 구간은 자연생태의 거울이며 대전 신도심의 허파와 같은 역할을 한다.
대전은 시내를 흐르는 하천들이 천변길로 연결이 잘 되어 있어 보행자와 자전거 라이더들한테는 행복한 도시다.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10분 남짓 달리면 갑천에 닿을 수 있다. 잠시 벤치에 앉아 갑천의 반짝이는 윤슬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인 듯 홀황하다. 봄에는 천변마다 피어난 벚꽃을 눈에 넣으면서 페달을 밟고, 가을에는 관평-전민동 천변 10리길 억새군락지에서 내뿜는 은빛의 출렁거림에 가슴이 아리는 라이더가 된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본성을 잃지 않고 형상을 고집하지 않는 유연함으로 좁은 곳에서는 여울을 이루며 넓은 곳에서는 유유히 흐른다. 상대에 응하며 흘러갈 뿐이다. 그런 물의 덕을 닮아서인지 전국 각지에서 흘러와 이곳에 고인 사람들은 모나지 않은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30여 년 동안 대전의 풍경도 참으로 많이 변했다. 대둔산이 갑천과 유등천을 이끌고 길게 이어져 온 산줄기가 도솔산을 끝으로 펼친 너른 둔덕인 둔산은 중심 시내가 되었다. 도솔산에 올라 갑천을 지나 넘실대는 학하리 들녘의 누런 벼 이삭 너머로 뉘엿뉘엿 기우는 계룡산의 낙조는 아파트가 들어서 다신 볼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흔히 대전은 산과 하천이 잘 감싸고 있어 살기에 적당하다고 한다. 하지만 천변에 추억을 보듬고 세월과 함께 익어갈 나무 그늘이 없어 못내 아쉬운 점이 있듯이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도 있다. 물은 흐르다가 장애물에 막히면 때를 기다리며 천천히 힘을 모아 흐른다. 대덕연구단지 테크노 산업단지 엑스포 지구는 그동안 축적한 에너지로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어 대전의 모습을 차츰 바꾸어 나갈 것 같다.
천변길을 오가며 흐르는 물을 보면서 생각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듬었다. 저 갑천의 품 안에서 다양한 생물이 어울려 생명의 율동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도 삶의 그물망을 이루며 살아간다. 하천은 도시의 숨길과 같고 도시의 성격을 이끈다. 오늘도 싱그러운 봄바람을 맞으며 느릿느릿 갑천을 걷는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터무니없고 힘들더라도 하늘에는 새가 날고 물에는 물고기가 펄떡이고 사람들은 하천을 벗 삼아 소요한다. 함께 사는 세상의 맛이란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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