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재미는 찾는 자에게 보인다. 그만큼 감춰진 도시의 매력 또는 보물을 찾는 일은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 중도일보는 대전의 매력 찾기를 대전시립박물관(관장 정진제)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대전시립박물관은 대전의 역사와 문화를 모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1990년 향토사료관으로 출발했고 2012년 역사박물관과 선사박물관으로 분리해 2017년 운영 조례 개정으로 대전시립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2019년 시립박물관과 선사박물관, 근현대사전시관 3관 체제로 운영을 시작했다. 대전시립박물관에는 2022년 3월 기준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총 9796점, 선사시대부터 조선은 물론 근현대 역사 유물이 총집합돼 있다. 이 가운데 주요 유물 15점을 선정했다. 대전시립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세 차례에 나눠 소개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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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충남에서는 세번째로 확인된 청도기 시대의 비파형동검. 사진=대전시립박물관 |
▲비파형동검=무려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다. 길이 18.8㎝, 폭 4.1㎝, 두께 1.2㎝다. 청동기시대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날 부분이 대칭으로 곡선을 이루며, 검신 한 가운데에 등대가 있고 별도의 자루(柄部)를 결합해 사용하도록 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반도에서는 현재까지 함경도 지역을 제외하고 전역에서 확인됐다. 약 40여 점이 알려져 있는데 주로 석관묘(石棺墓)와 지석묘(支石墓)에서 출토됐다. 부여 송국리 석관묘, 대전 비래동 지석묘 등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출토되는 것은 자루를 끼우는 슴베(莖)에 홈이 나 있는데 중국 동북이나 북한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특징이다. 상대동 청동기시대 석관묘에서 출토된 이 비파형동검은 무덤의 바닥에서 20cm 상면의 개석 바닥면과 같은 높이에서 확인되었으며 검신을 의도적으로 6분할해 한데 모인 상태였다. 이는 어떤 의례 행위 후 개석을 덮기 전에 부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대동 비파형동검은 파쇄된 상태이기는 하나 대전·충남 지역에서는 세 번째로 의미 있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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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황씨 병형묘지의 주인은 김국광의 부인이자, 김극뉴의 어머니, 황희의 손녀다. 묘지의 내용은 유자광이 썼다. 사진=대전시립박물관 |
▲청자철화 장수황씨 병형묘지=정경부인 장수황씨의 묘지이다. 장수황씨는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을 주도한 광산김씨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의 부인이자 대사간 김극뉴(1436~1496)의 어머니이며, 황희(黃喜, 1363~1452)의 손녀이기도 하다. 병형(甁形) 분청사기 묘지로서는 희귀한 형태이다. 저부(低部)는 뚫려 있으며 구연부(口緣部) 일부가 파손된 상태다. 묘지의 내용은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이 썼는데 이를 통해 묘지의 주인공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과 해당 인물의 지역과의 연관성을 알 수 있으며 기형이 특이하고 절대 연대를 확인할 수 있어 도자사 연구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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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신걸이 부인에게 쓴 한글편지로 조선시대 의복과, 명기 등과 함께 발견됐다. 편지 내용에는 회덕 온양댁이라는 수신인이 적혀 있다. 우리나라 현전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편지다. 사진=대전시립박물관 |
▲나신걸이 부인 신창맹씨에게 쓴 한글편지=안정나씨 대중회에서 기증한 유물로 현재 복제본을 전시하고 있다. 안정나씨 묘역에서 미라 4기와 140여 점의 조선시대 의복, 명기 등과 함께 발견된 한글편지다. 나신걸(羅臣傑, 1461~1524)의 부인인 신창맹씨(新昌孟氏) 묘에서 출토됐으며 여러 번 접힌 상태인 총 두 장의 편지가 확인됐는데, 두 장의 편지가 이어진 것인지 따로 보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군관으로 멀리 나가 있는 남편 나신걸이 고향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것으로 비교적 정연한 글씨로 작성됐다. 아내 신창맹씨에게 분과 바늘을 사 보낸다는 내용에서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알 수 있다. 편지의 뒷장에는 '회덕 온양댁'이라는 수신인이 적혀 있다. 내용 중에 '영안도'의 군관으로 간다는 내용이 있는데 실록에 따르면 1470년부터 1498년까지 함경도를 영안으로 개칭(改稱)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따라서 이 편지를 쓴 시점은 적어도 1498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현전(現傳) 가장 오래된 한글 편지로 한글이 창제된 지 50여 년 만에 충청도 회덕 지방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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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립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중 하나다. 이시방의 30세 무렵 청년 모습으로 추정되는데 조선 17세기 초반의 정사공신도상의 전형과 화법을 보여준다. 사진=대전시립박물관 |
▲이시방 초상=연안 이씨 이시방가 이종억이 기탁한 유물인데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시방 초상화 중 흑단령포(黑團領袍)를 입은 공수자세의 전신교의 좌상으로, 인조반정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될 때 그려진 정사공신상이다. 검은 오사모의 높이가 다소 낮고 양쪽으로 뻗친 뿔은 이전 시대보다 짧고 넓어졌다. 배채(背彩)를 사용하여 맑게 표현했고, 윤곽선은 옅은 갈색으로 그리고 선염법(渲染法)으로 음영처리를 했다. 이마에는 둥근 흉터가 있는데 어렸을 적에 말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라고 집안에서는 전해진다. 풍성하게 그려진 흑단령은 굵고 짙은 선으로 윤곽을 표현하였으며, 운문단(雲紋緞)을 상세히 표현했다. 의자 뒤에 삼각 형태로 삐져나온 무를 표현했으며, 바닥에는 채전(彩氈 )을 깔았다. 허리에는 학정금대를 두르고 가슴에는 운안흉배를 부착했는데 문관 2품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초상화는 정사공신 책록 후 곧바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공신교서가 반사(頒賜)됐던 1625년 이후 이시방이 연성군에 봉해져 2품에 오른 30세 무렵 청년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17세기 초반 정사공신도상의 전형과 화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화려한 색감과 세련된 필치로 그려진 초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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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송준길이 사용했던 벼루와 벼루갑이다. 벼루상자 상단에 임지청사라고 쓰여 있다. 사진=대전시립박물관 |
▲송준길이 쓰던 벼루와 벼루갑=흑칠 벼루 세트는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1606~1672)이 사용한 것으로 전해온다. 남포석(藍浦石)으로 만든 장방형의 벼루를 넣고 외부에 흑칠 벼루상자를 맞춤으로 짰다. 남포연은 보령 남포면 성주산 밑에서 나는 것으로, 조선조 이후 벼루 공급의 70%를 차지할 만큼 사대부의 필수품이었다. 벼루상자 상단에는 금분으로 커다랗게 '臨池淸事(임지청사)'라고 썼는데, 한나라의 서예가인 장지(張芝)가 글씨 공부를 열심히 해 연못의 물이 검게 변했다는 고사를 빗대어 서예 공부의 마음가짐을 다지고자 한 동춘당의 웅장한 필체가 돋보인다. 벼루상자 안쪽에는 주희(朱喜)의 글씨 쓰는 좌우명인 '書字銘(서자명)'을 금분으로 썼는데, 분방하면서도 긴장감이 넘치는 필력이다. 주자를 흠모한 도학자로서의 면모가 보이는 귀중한 유품으로, 동춘당가 후손에게 전해진 것이다. 동춘당 사후 송시열은 흑칠 위에 이금(泥金)으로 쓰인 글이 마멸될까 염려돼 후손이 새기어 오래 보존하려 했으나 그 효심까지는 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글을 남겨 이 벼루상자의 주인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정리=이해미 기자 ham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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