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광 소장 |
1969년 9월 남산 드라마센터 무대에 선 갓 스물한 살의 청년 한대수가 전주도 없이 느닷없이 토해내는 절규에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당시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똑딱똑딱 울리는 시계 초침 소리로 청중들의 기대를 고조시킨 다음 향을 피우고 톱을 켜며 외치듯 전위적으로 노래했다.
무엇이 청년 한대수를 이토록 절규하게 했나. 그는 음악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이 곡의 배경에 대해 "답답한 나의 개인 생활과 우리 사회의 돌파구 없는 좁은 관념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했다.
한대수의 부친은 서울공대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그가 7살 때 미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지 몇 해 만에 재가했다. 한대수는 할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는 뉴욕에서, 중·고등학교는 한국에서 다니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그 후 FBI의 도움으로 17살에 아버지를 찾았으나, 그는 한국어를 깡그리 잊어버린 채 백인 여자와 결혼해 살고 있었다. 어쨌든, 이때부터 다시 미국에서 아버지와 살게 된 한대수는 뉴햄프셔 대학 농대를 거쳐 뉴욕사진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 스튜디오에서 시간당 2.5달러를 받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긴 방황 끝에 어머니의 부름으로 장발에 히피의 복장을 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가족의 기대와는 달리 무교동의 쎄시봉으로 찾아가 노래를 불렀다.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과 조영남의 딜라일라에 이어 그가 노래를 부르자 관중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노래는 당시 팝 번안곡 위주로 서정적이며,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던 포크 음악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물 좀 주소’는 태평양을 오가며 사춘기를 보내야 했던 청년의 내면세계가 그저 뿜어져 나온 것인데, 유신정권은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 금지곡으로 만들었다.
이제 한대수가 드라마센터에서 ‘물 좀 주소’를 부른지도 벌써 50년이 훌쩍 지났다. 군사독재 시절도 끝났고, 1인당 국민소득이 210달러이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면 지금 2020년대에는 숨 막히고 암울한 청년 한대수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을까?
자식을 나 몰라라 내버려 두거나, 모양 빠지지 않게 좋은 대학만 강요하는 몰상식한 부모는 차치하더라도 우리 기성세대들 모두가 청년들의 돌파구를 가로막는 좁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기존의 질서가 최선이라고 강요하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유를 구속하려는 우리가 ‘물 좀 주소’를 금지곡으로 만든 그 시대 위정자와는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아직도 많은 젊은이가 "목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라고 절규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다.
한 대수는 "록 음악의 본질은 반항이다. 10代 자체가 반항의 세월이며, 부모 시대의 체제와 가치에 대한 반항이다"라고 했다.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의 반항이 파괴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좋은 반항이 되도록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넛지(nudge) 해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대수는 지금 뉴욕에서 아내 옥사나, 딸 양호와 함께 평범하게 살고 있다. 그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매일 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는 "한때는 시신 보관 시설도 부족했어요. 모두 집에 다 갇혀 있고요. 식량을 사기 위해서는 오전 6시부터 줄을 섰어요. 가족의 식량을 구하는 것이 제 임무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심장에 기계를 달고 살면서도 72세이던 2020년 새 앨범을 발표했다. 여기에 수록된 신곡 'pain pain pain'은 코로나19로 인해 인류애가 없어진 것에 대한 고통을 노래했다고 한다. 그는 밥벌이를 사진 기술로 해결하면서도 항상 당대 가장 도전적인 음반들을 발표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뮤지션이다.
뉴욕에서 딸 양호를 키우며 자연스럽게 ‘로큰롤 할배’가 돼 가고 있는 한국 포크록 대부의 아름다운 도전을 응원한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목마른 외침에 귀 기울이며. /양성광 혁신과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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