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 길 모퉁이에 한 과일 행상이 있었답니다. 손을 다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리어카를 마련해 자기 마을 어귀에서 과일행상을 하게 되었답니다. 장사를 하던 어느 날 한 손님이 다가와 묻더래요.
"이 사과 어떻게 하지요?"
"예 ! 천원에 두 개 드립니다."
그 사람은 삼천 원을 내고 사과를 고르는데 작고 모나고 상처가 있는 사과만 여섯 개를 골라서 봉투에 담아 가더랍니다. 며칠 후 그 사람이 또 와서는 똑같이 그렇게
사과를 작고 모나고 상처 난 것만 골라 담더랍니다. 그 사람이 세 번째 오던 날 행상이 말했답니다.
"손님 이왕이면 좋은 것으로 좀 고르시지요.!"
손님은 행상이 하는 말을 듣고도 그저 웃는 얼굴로 여전히 작고 시들고 모나고 못생긴 사과만 골라 담으며 말하더랍니다.
"그래야 남은 사과 하나라도 더 파시지요. 저도 어렵게 사는데 댁은 더 어려워 보이세요. 힘을 내세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행상은 숨이 멈춰지더랍니다. 그리곤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답니다. '아직은 세상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렇게 있구나.' 사과 봉지를 들고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더랍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용기가 불끈 생기더랍니다.
나의 작은 배려가 누군가에게는 보약 같은 힘이 되고 음지에서 양지를 찾는 이의 희망의 불빛이 되기도 한다. 세상은 잘 사는 사람도 많지만 아래를 보면 나보다 못살고 힘들어 하는 사람도 많다.
비단결은 곱다, 비단결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그보다 더 곱고 아름답다.
더불어 사는 삶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비단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비단결 마음이 따로 있나!
음지에서 지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따듯한 손길을 주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비단결 마음인 것을…
아니. 따뜻한 가슴으로 보듬어, 사랑하고, 정으로 살게 하는 바로 그것이 비단결 마음인 것이다.
금년 5월 16일이었다. 대전 평생학습관 < 늘 푸른 학교 > 에서 중학과정 할머니들 수업을 하고 있었다. 아래층 사무실서 근무하는 직원이 공익요원과 같이 와서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주고 보니 비타 오백 드링크에 산삼 드링크 몇 박스를 갖고 왔다. 생각도 못했던 뜻밖의 일이었다. 사연을 물어보니 낯모르는 중년 부인이 나한께 갖다 주라며 곁들여 하는 말이 공부하는 학생 할머니들께 나누어 드리라 해서 왔다는 것이었다.
누구인지 메모 한 장도 없기에 바로 나가 찾아보았다. 누구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사무실직원한테 물어보았다. 이따가 전화한다 했으니 기다려 보라는 거였다. 수업이 끝난 후에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79년도 대전여고 졸업생 정길순 제자였다. 어제가 스승의 날인데 전화 한 통 못하고 죄송했다며 늦었지만 점심식사나 같이 하고 싶어 왔다는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다음 시간 들어가서 제자가 가져온 드링크제를 할머니들께 한 병씩 나누어 드렸다. 사연을 얘기했더니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감탄과 찬사 일색이었다.
2010년도 아내가 세상을 뜨고 내 괴로움과 절망에 빠져 식사도 못하는 흉물스런 모습으로 어려워하고 있을 때 발신인 없는 택배로 한약 한 박스를 보내어 감동으로 날 울렸던 바로 그 제자가 다시 또 한 번 눈시울을 뜨겁게 한 것이었다.
요즘처럼 삭막한 세상에 40년 전 은사를 챙기는 그 마음을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전민고등학교 수석교사 정길순 선생님!
어떤 비단결의 아름다움이나 따뜻한 가슴으로, 향내 나는 꽃으로 말할 수 있으랴!
가슴이 따듯한 얘기를 하다 보니 이번 추석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대전효문화진흥원서 근무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80년대 초반 충남고 졸업생, 대천서 사는 정지식 제자였다. 명절 인사차 대전 오는 중인데 거의 다 왔다는 내용이었다. 안타깝게도 근무 중이라 전화통화로 아쉬운 마음만 전했다.
집에 와보니 경비실에 커다란 선물 보따리 하나를 놓고 갔다. 보따리 아이스박스를 풀었다. 거기엔 올망졸망 플라스틱 찬 그릇이 13개나 있었다.
파김치, 오이김치, 포기 배추김치, 배추 절이 김치, 오징어포 무침, 무말랭이 무침, 고춧잎 무침, 계란말이, 연근장아찌, 고구마 줄거리 무침, 멸치 고추 볶음, 두부부침, 한우 갈비세트. !
그야말로 올망졸망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것은 찬 그릇이라기보다는 제자 부인의 정성과 사랑이 그릇마다 똬릴 틀고 있는 것이었다.
제자 부인이 벌여 놓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사랑과 정성의 백화점이 그대로 우리 집으로 옮겨온 느낌이었다.
진수성찬의 상차림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제자 부인의 비단결 마음에서 나온 정성과 사랑이 담긴 그릇그릇이 바로 산해진미요, 옛날 임금님 수라상이었다.
세상 어떤 값비싼 지불로도 안 되는 정성 사랑이,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눈에서 새어나는 염기의 액체로 희비의 감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자와 제자 부인은 특별한 마력을 가진 마술사임에 틀림없었다. 내 눈에서 새어나오는 액체인데도 맘대로 못하는 그 이상한 것이 뺨을 적시고 눈두덩을 붉게 물들이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제자 혼자만의 힘으로는 안 되겠던지 부인까지 동원하여 날 울리고 있으니, 난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혼자 사는 사궁지수(四窮之首)의 어려움을 걱정하여 겨울 되면 김장 해 보내고, 연중 명절, 생일까지 다 챙기는 자랑스러운 제자와 그 부인이었다. 부창부수(夫唱婦隨)가 따로 없는 부부 일심동체 지상의 천사임에 틀림없었다.
원래 훌쩍거리길 잘하는 울보가 오늘은 주책기가 발동했나 보다. 은밀히 숨겨두었던 그 아까운 염기의 액체가 미끄러지듯 얼굴에 지도를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분별없는 주책이라도 좋다.
느낌으로 오는 것을, 적시는 마음으로 만들고 있으니 이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
나는 그 때, 사람들이 슬플 때 흘리는 그것으로 뺨을 적셨지만 이 습기의 결정체는 그 빛깔이 행복이라는 색깔이라서 그 한 점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천상천사의 마음을 지상의 천사 하나에 또 다른 하나를 더한 제자 내외가 그대로 받아 그 아름다운 정성,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게 했으니 이 어찌 기쁨으로 오는 액체가 아니었으랴!
아니, 행복이 묻어나는 액체의 흐름이 아니었으랴!
비단결 마음이 따로 있나!
과일 장수 아저씨를 울린, 그 손님의 마음이, 발신인 없는 택배로 눈시울을 적시게 한 정길순 제자의 마음이, 빛깔 없는 액체로 날 행복감에 빠지게 한 대천제자 안팎의 마음, 바로 그것이 비단결 마음이 아니고 그 무엇이라 하겠는가 !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비단은 대가를 지불하고 사오는 거지만, 볼 수 없는 비단결 마음은 텅 빈 온혈가슴으로도 자생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세태인들이여!
우리 따뜻한 가슴으로 사람냄새 피우며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온혈가슴이 비단결 마음 불러내어, 웃음꽃 피우며 사는 우리 삶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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