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 : 萬(일만 만) 波(물결 파) 息(쉴 식) 笛(피리 적)으로 구성되었다.
출 전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비 유 : 안팎의 극심한 혼란과 갈등을 치유하여 평화를 간구함. 내부 갈등과 외부 혼란을 잠재움
어느 나라이든 전설(傳說)이나 설화(說話)는 있다. 특히 건국(建國)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이 설화나 전설로 기록되어있으며 한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영웅호걸(英雄豪傑)에 대해서는 거의 전설이나 설화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헌이 '삼국유사(三國遺事)'이며, 정사(正史)라고 일컫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전설과 신화가 등장한다. 이웃나라 중국(中國)이나 일본(日本)의 경우 건국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설화나 전설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신라 신문왕(神文王)은 즉위 후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하여 동해와 가까운 곳에 감은사(感恩寺/경상북도, 경주시 소재)를 지었다.
그런데 신문왕 2년(682)에 해관(海關)이 보고하기를 동해안에 작은 산(山)이 떠돌아다니다가 감은사로 향하여 온다는 보고를 받고 왕이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점을 쳐 보니,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수성의 보배를 주려고 하니 나가서 받으라 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견대(利見臺)에 가서 보니, 바다 위에 떠오른 거북 머리 같은 섬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왕이 풍우가 일어난지 9일이 지나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와 피리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이때 왕이 용에게 대나무의 이치를 물었는데, 용이 대답하기를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 것과 같아, 이 갈라지는 대나무[竹]도 역시 합하면 소리가 나는 것이요. 그리고 이 피리의 성음(聲音)이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이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삽시간에 해결되었다 한다.
이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을 한 번 불면 몰려왔던 적군이 물러가고, 앓던 병이 나으며 홍수가 나든 가뭄이 오든 한 번에 해결해 버리는 신라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특히 일본의 침략을 막는 효능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특이하게도 이 피리는 조령[鳥嶺/문경새재]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여 신라 밖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정절의 의미로도 해석되었다.
만파식적 설화는 극심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에서 비롯된 절실한 정치담론이다. 만파식적의 만파(萬波)는 '수많은 파도', 즉 나라 안과 밖의 극심한 혼란을 뜻하고, 식적(息笛)은 '갈등을 치유하는 피리'이니 평화(平和)를 간구함이다. 따라서 이 피리는 내부갈등(內部葛藤)과 외부혼란(外部混亂)을 잠재울 도구가 피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피리는 깊숙이 숨을 불어넣어야 소리가 나고, 귀를 기울일 때만 들리는 연약한 악기다.
이 고사는 권력과 폭력으로는 국민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고, 상대방의 귀(마음)를 얻지 않고서는 화합할 수 없다는 신라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설화다. 만파식적은 신라 멸망 후 고려 광종 때 경주객사에 동경관(東京館)을 지어 여기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초기부터 다시 이 옥피리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 도중 화재로 인해 유실되었으므로 광해군 때 경주부윤(지금의 경주시장)이 신묘한 피리가 없어진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 해서 옛 모습을 상고해 새로 만들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다 조선 숙종 때인 1690년, 동경관에서 근무하던 향리 김승학(金承學)이 폭우로 무너진 동경관의 담장을 보수하다가 전란 중에 누군가가 감추었던 것으로 보이는 문제의 옛 옥피리를 찾아냈다고 한다. 김승학은 피리를 집으로 가져가 죽을 때까지 보관했지만 그가 1707년 죽자 관아에 그 사실이 알려졌고 이것이 옛날 유실된 진품 옥피리로 추측하고 압수해 다시 경주 동경관에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옥피리에 관한 설화는 단지 신묘함이나 옥피리의 소리의 감상 정도의 내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 당(唐)나라까지 물리치는 전쟁으로 나라 안팎이 극도로 혼란했던 시기에 더군다나 신라와의 앙금이 깊은 백제와 고구려의 백성들과 통합이 가장 큰 정치적 부담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나 토템신앙의 힘을 빌려서라도 통합된 하나의 만족으로서 나라를 구현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에 새로운 정권이 등장했다. 자칫 잘못하면 기존의 권력세력과 신세력간의 갈등과 분열이 더한층 드러날 수 있는 시기이다. 이 불안한 모든 정황을 국민들의 소망을 기준으로 한다면 별다른 충돌은 없을 것이다. 곧 양보, 협조, 배려만이 갈등을 해소하는 길이 될 것이다.
장상현 / 인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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