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명의 기본적인 토대는 무엇보다 식량과 에너지일 것이다. 식량에 관한 한, 현세에서 쌀과 옥수수를 제외하면 우리에게 밀만큼 중요한 곡물이 있을까. 빵밀만 해도 세계 칼로리 소비량의 20%를 차지한다.
인류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착하여 경작을 시작한 때가 1만여 년 전인데, 보리 다음으로 가장 오래 재배한 곡물이 밀이라고 한다. 밀의 고향은 레반트 지역으로 불리는 아라비아 반도의 북쪽과 이라크, 이란,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그러니까 비옥한 초승달 지역인 것으로 추측한다. 이집트인들은 이미 6000년 전에 제빵소도 갖췄다고 한다.
로마제국이 밀을 주식으로 한 이후, 밀은 곡물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2020년에는 7억 6천만 톤이 넘었다. 옥수수는 생산량에서 밀을 앞서지만 주로 동물 사료용이기에, 사람이 먹는 곡식으로는 밀이 단연코 으뜸이다. 러시아, 미국, 캐나다, 프랑스, 우크라이나가 밀의 최대 수출국이다. 밀은 전 세계의 선물 거래소에서 거래된다. 오늘날에는 밀 가격이 오르면 세계의 곡물시장도 요동친다. 세계의 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도매상은 Archer Daniels Midland, Bunge, Cargill, Louis Dreyfus 등 4곳인데, 흔히 이니셜로 ABCD 그룹이라고도 한다. 이들 네 곳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70%나 된다.
밀은 더위에 약해서 열대 지방에서는 재배할 수 없지만, 성장 조건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아서 광의의 온대지역이라면 지구촌 어디서나 경작 가능하다. 그래서 여름 밀이나 겨울 밀로 경작되는데, 겨울 밀이 전 세계 작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영하 20°C까지 견딜 수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부 유럽은 10월에 파종한다. 비교적 추운 지역에서는 주로 봄이 되어서야 파종하는 봄밀이 경작된다.
경질밀은 열을 많이 필요로 해서 주로 지중해와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재배된다. 노란빛을 띄는 경질밀은 연질밀보다 글루텐 질이 더 좋다. 봄밀은 겨울밀보다 글루텐 함량이 더 높지만 맛은 겨울밀이 더 좋다. 적색은 타닌이 들어있어서 맛이 씁쓸하고 흰색은 타닌이 없어서 부드럽다. 그래서 제빵용 밀에는 적색 경질을, 제과용에는 흰색 연질을 사용하지만, 유럽에서는 프렌치 바게트, 잉글리시 토스트, 터키의 피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제분 기술 덕에 연질밀의 한계를 많이 극복했다. 그래서 연질밀을 종자밀이나 빵밀이라고도 한다.
밀은 수분 함량이 높고 영양이 풍부한 황토나 점토 토양이 경작에 이상적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비옥한 흑토는 최적의 경작지다. 이 두 나라의 밀 수출량은 세계 총 수출량이 거의 30%, 해바라기씨유는 80%, 옥수수는 19%에 이른다. 이런 두 나라가 전쟁 중이다. 그것도 파종하는 3월 봄철에 삽 대신 총을 들었다. 작년 가을에 파종한 겨울밀도 봄에 수확해야 하지만 손도 못쓰고 있다. 일종의 청야전술 같다고나 할까.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을 때 러시아군이 곡창지대의 밀을 전부 없애버렸듯이 말이다. 천연가스에서 비료의 원재료인 암모니아와 요소를 추출하는데, 세계 최대 천연가스 수출국이 러시아다. 비료로 키운 농작물로 얻은 식량이 세계적으로는 절반이 넘으니 이 또한 또 다른 청야전술인 셈이다. 세계의 곡창지대인 두 나라의 전쟁이 식량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공격성이 무조건적 충동이 아니라 선택적 전술임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이성만 배재대 항공서비스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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