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섭 교수 |
대학 통합을 추진하는 명분은 대개 경쟁력 강화와 대학 특성화다. 2004년 발표된 대학구조개혁 정책에 따라 12개 국립대학이 6개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대학 자체 발전전략 수립과 캠퍼스별 특성화 및 유사·중복 학과 통폐합으로 교육여건을 개선하고 고등교육 내실화와 질적 고도화를 도모했노라고 교육부가 평가한 바 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나는 시점에서 대학 경쟁력을 높이고자 한 통합정책의 목표가 모두 충실히 달성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대학은 여전히 위기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있고, 유사·중복 학과 처리 과정에서 대학마다 상당한 진통을 겪었으며, 지역 간 이견으로 약속된 교명 변경조차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통합 후 선택된 교명에서 확인되듯 특성화에 기반을 둔 전환보다는 대부분 큰 대학이 작은 대학을 흡수하는 모양새를 따랐다.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작은 대학의 경우 통합의 과정에서 불평등한 평가와 대우가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본말이 전도된 인식이 있다. 대학 통합은 위기의 국면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더 낫게 도약하는 혁신의 한 방편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목표로 부상하는 착시를 일으켜, 통합 후에도 혁신과업을 달성하기보다는 갈등과 혼란을 일으키고 예산을 낭비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혁신을 통해 특성화와 경쟁력 강화를 이뤄내는 노력을 다하고, 그 과정에서 필요할 경우 통합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왜 통합을 추진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과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를 구성원의 의견을 물어 꼼꼼히 살핀 다음 자연스러운 통합 모델을 생각해볼 만하다.
대학의 위기에 관한 논란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학령인구 감소 전망 또한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데도 인제 와서 통합논란으로 호들갑을 떠는 모양새는 그동안 이에 대한 대책과 혁신에 태만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오히려 통합이라는 거대 담론에 기대어 혁신을 게을리하고 에둘러 가려는 건 아닌지를 의심해봐야 한다. 일정을 정한 통합추진보다는 혁신과 특성화 과제가 먼저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역사적으로 혁신은 위기의 상황에서 크게 성과를 냈다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위기를 더 크게 느끼는 약자로부터 혁신의 열망과 성과가 더 크고 괄목할 만했다. 거대조직은 위기상황을 직시하기 힘들다. 그리하여 ‘대마불사가 아니라 대마필사’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다. 위기상황에서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 피해가려는 선택은 결국 약자의 설움으로 귀결됐음도 우리 역사를 통해서도 뼈저리게 교육받아왔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 문명이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이어왔다고 진단했다. 학령인구 감소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세상은 대학을 끊임없이 혁신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대학들은 캠퍼스가 없이 모든 수업을 온라인으로 진행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버드대보다 입학하기 힘든 학교로 꼽히는 미네르바 스쿨 같은 새로운 형태의 대학과 경쟁해야 한다. 맹목적 통합은 대학을 혁신의 시대적 거대 물결 속에서 잠깐 피해갈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하겠지만, 뼈를 깎는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결국 체질만 약해져 더 처참한 모습으로 내몰리게 마련이다. 대학이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송복섭 한밭대 건축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