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생의 시네레터] 시간의 터널을 통과한 빛 '미싱타는 여자들'

  • 오피니언
  • 김선생의 시네레터

[김선생의 시네레터] 시간의 터널을 통과한 빛 '미싱타는 여자들'

김대중(영화평론가/영화학박사)

  • 승인 2022-03-10 16:38
  • 수정 2022-03-10 18:17
  • 신문게재 2022-03-11 9면
  • 한세화 기자한세화 기자
미싱 타는 여자들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피복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는 이 일을 계기로 본격적인 노동운동과 근대화에 대한 지식인 계층의 성찰과 비판적 참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후 벌어진 거시적 흐름 속에 있었던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미시적으로 그려냅니다.

주인공들은 여자라서, 가난하기 때문에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나 가혹한 노동 현장에 놓였습니다. 그들은 이념이나 사상 때문이 아니라 배우고 싶은 열망, 사람다운 만남으로 인해 노동자 교실을 애타게 사랑했습니다. 어둡고, 좁고, 먼지 나는 봉제, 피복 공장에서 하루 열다섯 시간씩 일해야 했고, 명절 때는 잠도 자지 않고 미싱을 돌리고, 다리미질해야 했던 그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을 불행하고 어두운 시대의 희생자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그 시절 찍었던 사진들, 주고받았던 편지들, 그리고 함께했던 기억에 대한 회상을 통해 어려웠지만 꿈과 사랑, 우정을 나누며 고귀하고 존엄하게 살아있던 존재로 보여줍니다. 오프닝 장면의 탁 트인 하늘 밑 언덕에 놓인 미싱을 돌리는 나이 먹은 그들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비록 어둡고 좁다란 터널이지만 희망의 빛을 향해 걸어온 어린 시절의 앳된 그들의 시간도 더없이 귀하고 소중합니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객관성과 따뜻하고 정겨운 감성의 균형을 놀랍도록 잘 유지합니다. 섬세하고 치밀한 연출력 덕분입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 옛 노동의 현장을 찾은 주인공들이 좁고 어두운 계단과 복도를 지날 때의 긴장과 팽팽한 공포감 뒤에 설치 미술처럼 놓인 그 시절의 사진들과 만나며 펼쳐지는 환한 빛의 향연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잘 드러냅니다. 빠른 장면 전환과 편집, 그리고 조명의 사용을 통해 어찌 보면 표현적이기까지 한 연출은 그러나 인물들과 그들이 지나온 시간에 대한 애정과 경의로 인해 흔들림 없이 조화롭습니다.



임미경 씨가 구치소에 있는 동안 받은 책 속에 은밀히 적힌 격려와 미안함의 글귀를 회상하는 장면은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검열 통과를 위해 들인 '천국의 열쇠'라는 책 제목과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인간다운 삶과 노동을 위한 투쟁 끝에 갇힌 동료를 향한 뜨거운 위로. 역사는 이들의 값진 희생과 노고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전진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3.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