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함을 달랠 요량으로 지인 문인들과 낮술을 마셔 봐도 이에 대한 서운함은 쉬이 희석되지 않았다. 발밤발밤(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는 모양) 보문산과 계족산, 계룡산에도 올랐으나 다리만 아팠지 마음의 공백은 여전했다.
그럴 즈음, 지인이 하산 중 다리가 골절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젊어 농땡이는 늙어 보약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젊어서부터 건강 관리를 잘해야 늙어서도 건강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렇게 건강부터 챙기며 사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보릿고개 즈음 태어난, 숙명적인 가난의 그늘이 여전히 짙었던 베이비부머와 그 선배 세대들은 먹고사는 근원적 명제에서부터 허덕여야만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등화가친(燈火可親)으로 공부를 하여 일자리를 구했다. 결혼까지 하니 가족이 형성되었다. 비록 가난하여 나는 못 배웠지만, 아이들만큼은 잘 가르치자고 이를 악물었다.
맹모삼천지교 몇 배 이상으로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교육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갖은 고생을 퍼부었지만 부모의 생각과 바람처럼 경제적 아람(밤이나 상수리 따위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 또는 그런 열매)의 자강불식(自强不息)이 되는 건 힘들었다.
통념상 서른 이전이면 결혼했던 베이비붐 세대와 달리 그 자녀들 중 일부는 마흔이 넘도록 심지어 혼인할 의지가 아예 없다는 '비혼주의자'도 적지 않다. 그러던 와중에도 무심한 세월은 저벅저벅 흘러 베이비부머들은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기에 이르렀다.
퇴직금과 연금 수령액이 넉넉하다면 문제가 없지만 반대의 경우는 당장이라도 일을 해야 한다. 여하튼 2월로 접어들면서 낭보가 왔다. 작년에 면접까지 치러 합격한 뒤 겨울 동안 한시적으로 보류되었던 일자리가 3월부터 마침내 시작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모처럼 염색을 하고, 향수도 비싼 걸 사서 뿌렸다. 그런 새 출발의 자세와 차림으로 출근하여 만난 '직장'은 종묘장(種苗場). 눈도 뜨지 못한 식물과 꽃의 씨앗, 그리고 여전히 겨우살이인 모종, 묘목들이 교교하게 인사했다.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온도에 맞게 그들도 점차 꽃눈을 뜨기 시작했다. 신기하고 반가웠다. 덩달아 첫 손녀를 보던 날이 오버랩 되었다. 태어나서 채 눈도 뜨지 못하고 울던 녀석이 어느새 어린이집 2년차 '학생'이 되었다.
올부터는 손자도 어린이집 원아로 등록했다. 일반적으로 꽃은 식물의 그것처럼 적당한 온도에서 일정기간 경과하면 꽃눈이 생긴다. 꽃눈이 생긴 후 높은 온도나 해가 비치는 기간이 길어지면 더욱 키를 키우며 결국엔 누구나 반하는 '꽃'으로 거듭난다.
그러자면 묘목장에서의 정성은 필수다. 어제도 퇴근하면서 비닐하우스 안의 가득한 꽃눈 화분(花盆)들을 또 다른 비닐로 덮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밤새 포근하게 잘 자고 더욱 성장하라는 의미를 담은 이불인 셈이었다.
그들은 이제 4~5월이면 완연한 꽃으로 만개할 것이리라.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라는 것이 유지경성(有志竟成)이다. 꽃도 마찬가지다. '꽃으로 환골탈태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식물은 반드시 꽃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유지경화(有志竟花)라는 주장이다.
봄이 되었으니 우리 주변이 모두 꽃 세상으로 변할 날도 멀지 않았다. 대통령선거도 끝날 테니 이후로는 베이비부머와 서민들의 경제 사정도 그리된다면 그게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일 텐데.
홍경석 / 작가·'초경서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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