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6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향년 89세로 서거하셨다. 1933년 아산에서 태어나 부여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문학평론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소설가, 시인, 베스트셀러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문학사상>을 창간하여 한국문학을 지탱하는 문학잡지로 키워냈다. 대학교수, 언론인이며 행정가로, 크리에이터로 활동한다. 88올림픽 문화행사를 총괄한 세계적 문화기획자이기도 하다. 말년엔 자신의 정체성이 우물 파는 자라고 자평하기도 한다. 이어령이 왜 이어령인가를 말해준다. 2019년 10월 조선일보 인터뷰 내용이다. "단지 물을 얻기 위해 우물을 파지는 않았어요. 미지에 대한 목마름, 도전이었어요. 여기를 파면 물이 나올까? 안 나올까? 호기심이 강했지. 우물을 파고 마시는 순간 다른 우물을 찾아 떠났어요. '두레박'의 갈증이지요. 한 자리에서 소금 기둥이 되지 않으려고 했어요. 이제 그 마지막 우물인 죽음에 도달한 것이고."
떠나는 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설치된 미디어 캔버스에 올라온 글이다.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며 즐거웠어요. 하늘의 별의 위치가 불가사의하게 질서정연하듯 여러분의 마음의 별인 도덕률도 몸 안에서 그렇다는 걸 잊지 마세요.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여러분과 작별합니다.",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났다. 군 생활 할 때 중대에 비치된 책이었다. 1963년에 출판되어 1년 동안 1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다. 대만,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각광 받아 40만부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립의 나이에 이런 글을 썼다고 하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23세 젊은 나이에 <우상의 파괴>란 평론으로 문단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전형적인 시골 풍경과 생활모습이 펼쳐진다. 울음, 배고픔, 눈치, 정겨움, 귀, 장죽, 바가지, 숭늉, 윷놀이, 초가, 돌담, 가난, 달빛, 노송, 황토, 자갈, 질경이, 산자락 따라 돌던 우마차길, 냇가에 서있는 미루나무, 아카시아, 토정비결, 서낭당, 무덤, 우리와 나, 사랑, 과거지향, 매와 멍석 등이 등장한다. 누구나 만났을 법한 대상에서 민족의 서사와 문화의 질곡을 읽어낸다. 거기에 외국의 비교자료와 풍부한 지식이 첨가된다. 그를 통하여 풍경 뒤에 숨은 것, 문명에 가려진 것들이 걸어 나온다. 새롭게 단장한 일상을 만난다. 읽는 내내 감탄의 연속이었다.
<축소 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명저이다. 아름다운 말이라서 가감과 요약이 어렵다.
디지털 기술의 풍요로움을 마음껏 활용하려면 그동안 축적해온 아날로그 정서를 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터넷 공간에는 동서남북이 없지만 여전히 오늘도 해는 동쪽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뜬다. 무엇보다도 디지털로는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 설날의 떡국 맛이다. 모든 감각을 양자화 하여 빛의 속도로 보낼 수 있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이 천만번 까무러쳐도 못하는 것이 어금니로 씹는 미각의 맛이다."
정보를 액체도 고체도 아닌 공기에 비유하며, "공유는 해도 독점할 수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이다. 사용을 해도 없어지지 않고 순환하는 것 또한 공기의 특성이며 정보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있어도 가격은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정보다."
"기러기는 질서 있게 협력하며 난다. 꼴찌라고 열등감이 있을 리 없고, 앞장서려고 싸우는 일도 없다. 순환의 법칙을 지켜 멀리 날뿐이다."
"왜 아침은 이렇게도 아름다운가, 아직 그 빛 속에 어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저녁노을은 왜 이렇게도 아름다운가, 다가오는 어둠 속에 아직 빛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어령 장관 재직 시 문화부에 근무한 친구가 있었다.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보통은 국무회의 들어가면, 수첩하나 들고 가 열심히 받아쓰고 나온다는 것이다. 과거 보편적인 회의 문화였다. 이어령 장관이 입각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장관도 말을 하는 것이다. 지나쳐서 장황하기까지 했다. 풍부한 지식과 상상을 초월한 창의력으로 막힘이 없었다. 그 대가로, 그러면 문화부에서 이 일을 하시지요. 타 부처에서 일을 떠다밀었다. 문화부와 별 관계없는 일도 받아들고 와 직원들은 꽤 힘들었다고 한다. 정말 힘들다기보다는 좋은 장관을 모시고 있다는 자긍심이 뚝뚝 떨어졌던 기억이다.
생의 진실을 묻자 "모든 게 선물이었다"고 답한다. 내 힘으로 이룬 게 없다고 한다. 항상 번뜩이는 광야의 언어, 천둥 같은 놀라운 인식으로 세상을 열어주었다. 언어의 거인, 사막 한가운데 펼쳐지는 오아시스,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필부가 보지 못하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뛰어난 통찰력과 무엇이고 녹여내는 찬란한 표현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진리에 대한 갈증과 창의적 언어습관이 아니었을까?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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