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 연대의 정치,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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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 연대의 정치, 페미니즘

최영민 전 대전여성단체연합 대표

  • 승인 2022-02-27 08:45
  • 이해미 기자이해미 기자
최영민 대전여성단체연합
최영민 전 대전여성단체연합 대표
삶은 겸손을 배우는 긴 수업이며, 갇혀 있는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특히 틀을 깨는 것은 관습과 제도, 법, 정의, 이념, 가치관, 가족, 국가, 시민, 성별, 정체성 등 개인과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무정형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기에 불편하고 수고로운 작업이다. 그러나 틀을 깨고 나오면, 관점을 바꿔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작하면,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SF 작가 어슐러 K. 르 귄 단편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풍요롭고 행복한 도시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왜 행복한 도시를 떠날까? 행복함의 경계를 스스로 벗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멜라스에서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 좁고 어두운 지하방에 단 한 명의 아이만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계약을 지켜야 한다. 아이가 왜 갇혀있어야 하는지, 언제부터 갇혀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불행해야 한다는 계약이 지켜져야 오멜라스 시민의 전체 행복은 유지될 수 있다.

한편 도시의 모든 아이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지하방에 갇힌 아이에 대해 교육을 받고, 직접 찾아가 보기도 한다. 처음엔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해하지만 아이를 지하방에서 데리고 나오는 순간, 오멜라스 시민 수천 명의 행복과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을 알고 있기에 어둡고 오물로 가득 찬 지하방에 갇힌 아이를 보고, 끔찍한 모순에 분노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부분 무뎌지거나 외면한다.

하지만 드물게 지하방에 갇힌 아이를 본 사람들 가운데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떠나는 사람들은 모두 혼자 도시를 떠난다. 작가는 소설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너무나 행복했던 도시를 떠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자기가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것 같다고.



그들이 가고자 한 곳은 어디였을까? 모든 시민이 누리는 행복의 동질성이 외부의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면서 획득되지 않는 곳, 한 사람의 불행과 내 행복이 유지되는 것이 타협되지 않는 곳,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지 않는 곳,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기를 희망하는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

대전지역에서 여성운동을 함께 한지 스무 해가 훌쩍 지났다. 대전여민회를 시작으로 대전평화여성회 대표를 거쳐 대전의 여성운동연합체인 대전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직을 맡아 활동했고, 상임대표직을 내려놓기까지 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미력하나마 여성주의 시각으로 나 자신과 세상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왔던 시간이었다.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나도 모르게 나를 만들어온 성별제도를 인식하고, 페미니즘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선물해줬다. 페미니즘이 성차의 비대칭성에 주목하는 인식이자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했듯이 현장에서 경험한 여성운동은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하는 능력뿐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사회 안에 사고하고,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명명하고 협의하고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페미니즘은 보편이 아니라 차이들을 드러내고 연결하는 연대의 정치다. 그러나 그 차이가 누군가를 혐오하고 배척하면서 집단을 강화하고자 하는 방식은 혐오의 정치다. 디지털 AI, 메타버스, 블록체인 등 새롭고 낯선 단어를 습득하고 적용하는 속도는 굉장히 빠른 반면 페미니즘, 젠더, 성인지를 이해하는 속도는 너무 느리고 쉽게 왜곡된다. 페미니즘으로 구분 짓고, 특정 집단을 결집하려는 정치는 악의적이고 위험하다. 여러모로 2022년은 전환의 해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우리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처럼 내가 제공 받는 행복이 누군가의 고통과 거래되는 것이 아닌지 성찰하되 '한 장의 나뭇잎처럼' 가볍게 걸어 다니시길 소망한다. /최영민 전 대전여성단체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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