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대에 걸쳐 30여 명의 역과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의 후예로서, 역시 역관으로 1829년부터 죽기 전 해인 1864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중국을 다녀왔다. 1828년 춘당대(春塘臺)에서 개강할 때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았으며, 시(詩)에 뛰어나 홍세태(洪世泰).이언진(李彦?).정지윤(鄭芝潤)과 함께 '역관사가(譯官四家)'로 불린다.
1843년에는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스승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 북경(北京)에서 구한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 8권과 운경(?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6권 2책을 보내주었다.
1844년 중국을 다녀와 제주에 있던 김정희에게 하장령(賀長齡)의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 120권을 보내주자, 김정희가 이에 감격하여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주었다. 1845년엔 임금으로부터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으며, 1847년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이 해에는 중국의 문인들에게까지 명성을 얻어 중국에서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시가 섬세하고 화려하여 사대부들에게 널리 읽혔다.
또한 청나라에서의 여정을 묘미 있게 나타내거나 위항인의 불만과 비판적 안목을 보여준 한시 「거중기몽(車中記夢)」, 「영지연(詠紙鳶)」, 「제로방거은비(題路傍去恩碑)」 등이 유명하다.
추사체(秋史體)로도 널리 알려진 김정희(1786~1856)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관료나 학자로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시련이 닥쳐온 건 당시 권세가들의 권력 다툼에 휘말린 탓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비정함을 새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제주도로 유배가 결정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당한다. 그때가 55세였으니 얼마나 고생이 막심했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로부터 8년 동안 모슬포(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서 갖은 고생을 다 했다. 다들 추사를 외면했지만, 그가 배출한 제자들 중 하나였던 이상적만큼은 달랐다. 이상적은 통역관으로 중국을 다녀올 때마다 귀중한 책을 구하여 추사에게 보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추사는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선물한다. 추사의 최고 걸작이자 국보 제180호인 세한도는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씨가 대를 이어 소중히 간직해온 것을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아무 조건 없이 기증하면서 그 가치를 다시금 인정받았다.
'세한도'는 달랑 집 한 채를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룬 간결한 그림이다. 그렇지만 유배의 시련을 이겨내려는 추사 김정희의 곧은 정신이 서려 있다.
귀양살이하는 자신을 잊지 않고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서까지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에게 답례로 '날이 추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도록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글과 함께 그려 보냈다.
대선이 열흘 앞으로 다가오면서 후보들의 난타전이 가열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의리는 커녕 한때는 외국여행까지 같이 다녀온 지인을 모른다며 딱 잡아떼는 이도 있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은혜와 의리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하다고 했다.
추사가 세한도에 썼던 글의 일부를 다시 음미한다. = "(전략) 그대의 정의야말로 추운 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조(節操)이다." =
홍경석 / 작가·'초경서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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