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메인 포스터 |
지난 해 가을 내내 하루 한번쯤 가슴에 손을 얹곤 스스로를 돌아보게 헸던 JTBC 16부작 '인간실격'. 홀아버지 슬하에 자라 정수(박병은 분)와 부부인 부정(전도연 분), 청소년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미선(강지은 분) 아래 홀로 자라다시피 한 강재(유준열 분). 두 연상 여인과 연하 연인의 인연이 이 드라마의 시냇물 줄기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 그냥, 그냥 다 나쁜 거야. 이유가 없어요. 길에서 고생하면서 키워준 아버지 생각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려고 했는데. 난 노력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 아부지, 나는... 아무 것도 못됐어. 결국 아무 것도 못될 거 같애요. 그래서 너무 외로워, 아버지. 아버지도 있고 정수도 있는데 그냥 너무 외로워."
"나는 아부지보다 가난해질 것 같애. 아부지, 더 나빠질 것 같애. 그러면 아버지 더 속상하잖아."
"아버지, 나 어떻게 해요. 나…… 나…… 아부지. 자격이 없어요."
- 제1화 부정이 아버지 창숙(박인환 분)과의 대화
외동딸 부정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아버지 창숙은 막 시작된 치매를 숨기며 폐지 줍기로 하루하루를 산다. 그런 아비에게 부정은 눈물로 고백한다. 스스로 아무 것도 되지 못할 것 같다고. 부정은 출판사에서 유명 연예인 아란(박지영 분)의 책을 대필해주었으나 배신 당한 채 SNS에 항의 댓글을 달았다가 고발을 당하고 출판사에서 쫓겨나며 아이까지 유산하기에 이른다.
우연히 부정과 창숙의 대화를 듣게 된 강재(유준열 분)는 함께 버스를 타게 되고 펑펑 눈물을 쏟는 부정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인연을 맺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무엇보다 무사히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살아가다 보면 조금은 괜찮은 날과 만나게 될 거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뛰다가 걸을 때처럼, 걷다가 앉을 때처럼, 오랜 시간이 지속되지 않을 평화라고 해도 쉬어가서 졸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날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쉬다가 걷는 것처럼, 걷다가 다시 뛰는 것처럼. 마치 비가 눈이 되어 쌓이는 것처럼."
- 강재가 부정에게 보낸 전화 메시지.
부정에게 위안을 주는 강재. 그러나 강재 또한 아들만을 바라보는 홀어머니 미선이 있으나 강재에게 위안과 안식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강재가 위로를 해줘야 하는 처지다.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강재는 가슴 속에나 흐르고 있을 아버지에게 독백을 한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잘 지내고 계신가요? 아시다시피 저는 여전히 아주 딱 엉망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아무 이유 없이 돈이 아닌 어떤 것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돈도 아니고, 이기고 지는 것도 아닌, 작고 이상한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 처음 만나는 세상을 들어가 보았습니다.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요? 무슨 기대를 했던 걸까요? 어디서부터 잘못 걸어온 걸까요? 마음을 따라 열심히 따라가 보았지만 결국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단 한 걸음도 가까워지지 못하고 한 걸음도 멀어지지 못한 채 다시 처음 그 자리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 죽은 아버지를 향한 강재의 독백.
강재가 '돈이 아닌 어떤 것'이라 표현한 대상은 부정의 삶. 결국 누구나에게 누군가가 원하는 일을 대행해주는 강재는 부정의 요구에 함께 한 공간에서 시간을 함께 한다. 강재와 부정의 대화 속에는 남편이나 가족에게 내색조차 할 수 없던 가슴 속 시냇물 소리가 들려온다.
강재 : "저는 실은 언제라도 누구라도 부담 없이 연락해도 괜찮은 그런 직업의 사람입니다. 혹시 누군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연락 주세요.
뭐 하고 싶어서 불렀어요? 하고 싶은 거."
부정 : "가끔은 집이 아닌 데서, 내 가족이 아닌 누구하고 그냥 아무 것도 안하면서 가만히 있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해요. 아무 말도 안해도 되고, 아무 생각도 안해도 되고,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는, 그런. 아무 의심도 기대도 없는 그런 사람하고..."
강재 : "집에 있는데 집에 갈 수도 없고, 엄마랑 있으니까 엄마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돌아버리겠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
부정 : "소풍은 아니고 그냥 사라지고 싶은 마음으로 왔어요. 가끔 그런 생각 하거든요. 내가 너무 싫어서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해가 지고, 배가 고픈데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으면서 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대로 어딘가 떠내려가는 것처럼 죽고 싶다. 근데 여기 오는 동안 좋았어요. 귤 같은 걸 왜 갖고 나왔는지 그랬는데 귤이 달았어요. 맞지도 않는 구두는 왜 신고 나왔을까 했는데, 벗으니까 편했어요. 화장실은 넓고 앉아 있다가 이렇게 누워 있고, 집에도 가고 싶어요. 아버지도 보고 싶고요. 심장에서 시냇물이 흐른다는 거, 나 그거 뭔지 알아요. 설명할 순 없지만."
강재의 어깨 안에서 잠이 드는 부정. 사람은 살아가면서 가장 가까운 남편이나 연인이 타인보다 더 멀고 아득하여 갈 곳이 없을 때가 있다. 차라리 모르는 누군가의 품이 그리운. 부정은 살아가는 고통에 지쳐 어쩌면 죽음과도 같이 사라지고 싶었던가 보다. 그런 그녀 곁에 문득 강재가 있어 준다.
나는 '인간실격'을 우리 시간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자존(自存)에 관한 드라마로 읽었다. 가족, 이웃, 친구와 선후배 사이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 존재들. 그러나 그 존재는 쉽게 무시 당하거나 외면, 또는 방관 속으로 잊혀져 가기도 한다.
"죽음이 뭔지, 산다는 게 또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결국 죽는 일도 사는 일의 일부라는 것. 그때에는 왜 알지 못했을까요? 아버지가 안계신 세상에서 하루도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지 알 순 없지만. 아버지, 난 이제 아버지가 제가 세상에 태어나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내내 눈으로 몸으로 삶으로 얘기해왔다는 것을 아주 조금씩 천천히 깨달아 가고 있어요."
- 16화, 부정이 아버지의 상을 치루며 아버지를 향한 독백
무엇이 되기보다는 무엇을 하는 삶. 누군가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보다 스스로 깨닫고 알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참된 존재의 의미가 아닌가? '인간실격'은 부정과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 그리고 강재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는 사람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하게 해준다. 그저 아무 이익이나 원하는 것 없이 어깨에 기대어 서로의 가슴 속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그런 사이, 그런 관계.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기승을 부릴수록 하늘은 맑고 노을은 곱게 스러지곤 한다. 겨우내 저 얼음장 밑으로 쉼없이 흘렀을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흘렀고 흐르고 있으며 흘러갈 시냇물처럼. 오는 봄 그 시냇물이 이르는 어느 이 한 사람 만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서로 함께 흐르는 여울일 수 있다면…….
올봄은 모두에게 그런 봄이길 소망해본다.
심상협 / 문학평론가
심상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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