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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천 인문사회대학 학장 |
한편, 인류가 사용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4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들의 쐐기 문자로 알려져 있다. 진흙을 구워 만든 점토판에 새겨진 뾰족한 모양의 글자 형태라고 하여 설형(楔形) 문자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쓰인 내용은 농축산물의 수확량과 상업적 교역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다른 문자의 기원이 인류 5대 문명권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가령, 로제타 비문(Rosetta Stone)의 해석으로 드러난 이집트 문명의 상형 문자는 기원전 3000년경에 쓰였고, 인더스 문명에서 쓰인 산스크리트 문자는 기원전 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황하 문명에는 한자가 기원전 2000년경부터 쓰였으며, 기원전 2600년 전에 시작된 마야 문명에는 표음 문자인 마야 문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인류 문명의 발원지에서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문자의 기원과 문명의 시작 및 확산이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만 그 이면에는 문자가 권력과 매우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도 놓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들 문명권에서 사용된 인류의 문자들은 공통적으로 재물, 위계화된 신분 계층 등 권력에 관계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정치적 권위와 경제적 특권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자의 사용은 신분의 안정과 권위를 보장하는 수단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문자의 보급이 종교의 전파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래 문자는 고대 사회에서 신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인식했을 정도로 문자를 신성시했으며 점점 소수 지배층의 전유물이 되었으며, 이들을 통해 지식이 점유되고 하나의 권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때 문자는 강력한 통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더욱이 동, 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까지 문자는 인간 상호간의 권력관계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요소였으며 이는 일상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작동되었다. 20세기 초까지 여성은 문자의 소외 집단이었으니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제한적이었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런 점에서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한글이라는 새로운 문자를 만든 것은 중세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히 혁명적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이렇듯, 권력과 통치의 수단으로 시작되었던 문자가 오늘날처럼 지식의 축적과 개인 삶의 성찰을 위한 도구에까지 쓰이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야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계층이나 젠더의 차이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문해력(리터러시)의 차이에 기인하지 않는 오늘날에도 문자는 여전히 새로운 지식의 습득과 기회를 포착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문자는 프랑스 작가인 사르트르(J. P. Sartre)의 언급대로 이 세상을 정복하는 수단이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문자에 기반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의 작동은 공동체는 물론이고 개인의 일상생활에까지 중요한 기제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백낙천 배재대 인문사회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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