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우시절' 중 한 장면 |
두산중공업 팀장으로 중국 스촨 출장길의 동하는 문학을 전공하고 아마 시인나 문인이 되고 싶지 않았나 하는 인물이다. 스촨 청두에 도착하자마자 두보초당을 찾았고 메이를 만나는 행운에 전화를 기다리며 호텔 숙소에서 펼쳐 보는 『두보시집』. 동하의 마음은 '춘망(春望)'에 오래 머문다.
나라는 파괴되었으나 강산은 그대로이니
성에는 봄이 오고 초목이 우거졌구나.
시절을 느끼어 꽃에도 눈물을 뿌리고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도 놀란 마음이네
봉화가 오랫동안 연이어 오르니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만큼 소중하다.
흰머리는 긁을수록 더욱 짧아져
거의 비녀를 이길 수 없을 지경이네
- 두보, '춘망(春望)', 757년.
두보의 '춘망'의 배경은 안록산의 난. 고난의 인생 여정 중에서 잠시 '두보초당'의 화목했던 가족들 모습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두보. 영화의 배경인 2009년 스촨은 전란은 아니었으나 1년 전 대지진으로 한창 폐허를 복구하는 중이다. 매몰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화환이 무너진 건물 잔해 위에 덩그런한 풍경들. 두보가 단란했던 가족과의 시간을 추억하듯이 동하와 메이는 시간은 미국 유학 시절 푸르던 젊은 날 풋풋하던 사랑을 그리워한다. 동하와 메이는 맥주를 마시고 거리 주점에서 사천 요리들을 먹으며 희미했던 기억들을 회상한다. 서로 사랑을 고백했던 기억이 엇갈리고 작은 오해들이 뒤섞이며 키스와 자전거의 기억조차 아스라하게 엇갈려 서로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튿날 저녁 동하와 메이는 다시 만나 사천요리집 '청화로'로 간다.
동하 ; "그런데 작년에 지진 났을 때 너도 여기 있었어?"
메이 ; "응"
동하 ; "뉴스에서 봤는데 끔찍하더라. 넌 괜찮았어?"
(메이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가 화제를 바꾼다.)
동하가 첫날 지사장(김사호 분)와 먹어보려다 진저리를 치며 뱉어버린 페이창펀(돼지내장국수). 그러나 메이 앞에선 페이칭펀을 좋아하는 것처럼 목이 막히면서도 잘 먹는 척하는 동하. 둘의 대화 속에는 대학 직후 헤어진 다음 각자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이 '김치'와 '페이창펀'이란 두 나라 음식의 은유 속에 숨어 있다. '공작새 요리'도 끼어든다. '두보초당'에서 같이 일하던 메이의 남편은 페이창펀을 좋아했고 스촨 대지진에 희생되었다는 일을 비롯해서.
메이 ; "호우시절이네. 두보의 시에 나오는 말이야.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뜻이야. 졸업논문으로 썼었거든. 나는 네가 시인이 될 줄 알았는데."
동하 ; "그러게.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처음엔 잠깐만 다니려고 했었어. 첫 월급만 타면 그만 두고 다시 글을 써야지 했는데... 그런데 다음 달 월급이 들어오고 또 승진을 하고 그러고 나니까 책임질 일이 더 많아지고 점점 더 그만두기 어려워지더라고."
메이 ; "그거 알아? 나 네가 쓴 시 참 좋아했어."
동하 ; "고마워."
메이 ; "그런데 내가 보낸 엽서 받아보긴 했어?"
(동하가 끄덕끄덕 받아보았다는 고갯짓)
메이 ; "왜 답장 안보냈어?"
동하 ; "쓰기는 참 많이 썼는데 보낼 수가 없었어."
메이 ; "왜?"
동하 ; "솔직하게?"
메이 ; "응, 솔직하게."
동하 ; "처음엔 사느라 바빠서 시간이 없었고 시간이 생겼을 땐 여자친구가 있었지."
메이 ; "어떤 여자였는지 궁금하네."
동하 ; "메이?"
메이 ; "응?"
동하 ; "내가 처음부터 널 사랑했단 걸 지금이라도 증명한다면 달라지는 게 있을까?"
메이 ; "동하.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걸까. 아니면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걸까?"
동하 ; "무슨 뜻이야?"
메이 ; "깜빡할 뻔했다. 증거는 찾았어?"
동하 ; "오고 있는 중이야."
메이 ; "기억해? 내가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 거…… 갈게."
사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동하도, 메이도. 서로 솔직해져서 대학시절로 돌아가는 시간. 호텔로 돌아온 동하는 노트북에 써내려간다.
'The Road. Those distant painful menoris'
그 길. 저 멀리 떠오르는 아픈 기억들
동하는 거기까지 쳤다가 다시 지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살아서 헤어지기도, 혹은 죽어서 영 이별하기도 한다. 동하도 메이도 지금 아픈 시간을 거슬러 연푸른 초목을 적시는 봄비. 그 설레이던 시간, 그 길로 동행하며 거슬러 오른다.
좋은 비는 그 내릴 시절을 알고 있나니
봄이 되면 내려서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구나.
비는 바람 따라 살며시 밤에 내리나니
사물을 적시거늘 가늘어서 소리가 없도다.
들길은 낮게 드리운 구름과 함께 캄캄하고
강 위에 떠 있는 배의 고기잡이 불만 밝게 보인다.
날 밝으면 붉게 비에 젖은 곳을 보게 되리니
금관성에 만발한 꽃들도 함초롬히 비에 젖어 있으리라.
- 두보, '춘야희우(春夜喜雨)', 761년.
금관성(錦官城)은 성도 지방을 이르는 지명. 가문 봄 대지를 적시는 봄 밤비를 반기는 시 한편. 712년생 두보는 안록산의 난 중이던 757년 45세에 가족을 그리워하며 '춘망(春望)'을 썼고, 4년 뒤 대기근 속에서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가족과 함께 떠돌다가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초당을 짓고 가족과 함께 살았다. '춘야희우(春夜喜雨)'는 그때의 시다.
인생이란 만나고 헤어짐의 긴 여정이다.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면서. 그중에는 사랑했지만 아스라 잊었다가 새뜻 봄비에 푸르러오듯 되살아오는 인연도 있으리라. 더러는 지진이나 전쟁, 또는 역병처럼 어쩔 수 없는 재난으로 헤어지거나 사별할 수도 있으리라.
메이는 두 대의 노란 자전거를 선물 받는다. 한 대는 유학 시절 이별의 선물, 또 한 대는 '두보초당'의 재회 이후 다시 보내온 선물. 동하는 두 권의 '두보시집'을 갖게 된다. 한 권은 스스로 산 시집, 또 한 권은 대학 졸업논문을 썼고 '두보초당'에서 해설사(?)로 일하면서 다시 두보의 인생과 시로 논문을 쓴 메이의 선물.
코로나로 어지러운 봄. 저 푸른 댓잎에 수런대는 봄비 긋고 난 신록 속으로 복사꽃 한닢 귀밑머리에 앉은 어느 이 선뜻 눈앞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심상협 / 문학평론가
심상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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