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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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그 나물에 그 밥이라니요

  • 승인 2022-02-16 10:26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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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제공
일년 중 가장 맛있는 밥을 먹는 날은 언제일까? 내겐 정월 대보름이 그날이다. 오곡밥과 나물들로 차려진 밥상. 청나라 서태후의 호화로운 황실요리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나물의 다채로운 풍미는 잊지 못할 맛의 추억을 선사한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이 있다. 비슷비슷한 것들을 싸잡아 부를 때 쓴다. 대선 시즌인 요즘은 정치인에게 많이 사용한다. 부패의 상징 정치인을 나물과 밥에 비유하다니. 인간에게 밥만큼 중요한 게 어딨나. 우리 산과 들에 나는 식물은 모르면 잡초지만 알면 몸에 좋은 약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정월 대보름은 가장 큰 마을 행사였다. 생명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는 의식인 셈이다. 오곡찰밥과 묵은 나물을 먹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푸지게 노는 축제다.

어릴 적 정월 대보름이 오면 엄마는 일찌감치 물에 불린 시래기, 호박고지, 고사리 등을 들기름과 마늘, 파 등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 볶아 놓았다. 김도 빠질 수 없다. 김 굽는 일은 가끔 나도 거들었다. 김은 아궁이에 불 때고 남은 재에 굽는다. 들기름을 발라 소금을 뿌리고 석쇠에 두 장씩 얹어 두세번 뒤집으면 된다. 김을 구우면서 날 김을 찢어먹다 엄마에게 지청구를 듣는 것도 일이었다. 헛간 바닥을 파고 겨우내 묻어둔 알밤도 꺼낸다. 대보름 전날 저녁에 먹는 오곡 찰밥과 나물 볶음. 그리고 뜨끈한 고등어 찌개. 무를 숭덩숭덩 썰어넣은 얼큰한 찌개와 온갖 나물에 오곡밥은 영양학적으로도 훌륭한 밥상일 터다.

나와 언니 오빠들은 배불리 밥을 먹고 서둘러 일어선다. 오빠들이 못으로 구멍을 숭숭 내고 관솔을 넣은 깡통을 하나씩 들고 들판으로 달려간다. 이날 밤 들판엔 동네 아이들이 다 출동한다. 저마다 깡통에 불을 붙이고 신나게 돌린다. 쟁반만한 보름달이 온 세상을 비추고 아이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팔이 아프도록 깡통을 돌린다. 건너편 마을 아이들과 어느 마을이 더 불길이 센지 경쟁도 한다. 그러는 사이 마을 뒷산 중턱에선 불빛 하나가 반짝인다. 마을을 대표로 하는 남자 어른 두 명이 거기서 자정에 산제를 지낸다. 그들은 몸을 정갈하게 씻고 소나무 아래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지어놓은 움막에서 밤을 지새운다. 한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농경문화의 풍습이다.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달은 어떤 의미일까.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면서 달은 과학기술의 대상이 되었다. 허나 달은 인류에게 언제나 낭만과 상상의 존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달은 고대부터 신으로 숭배되었다. 고대인은 달이 날씨를 좌우하고 물을 관장한다고 여겼다.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과정은 바닷물의 조수간만의 차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음기가 강한 대보름은 땅과 함께 여성으로 여겨 풍요를 상징한다. 동양과 달리 서양은 달이 광기와도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늑대인간의 설화가 여기서 나왔다. 보름달이 뜨면 저주받은 인간이 고통스런 변신을 거쳐 야수가 돼 인간을 해친다는 잔혹한 얘기 말이다.



퇴근 길 동네 과일가게에서 취나물과 부지깽이 나물을 샀다. 물에 불려 놓은 것이라 보들보들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시골 친정 어머니가 손수 뜯어 말려놓은 것이라며 믿고 먹으라고 권했다. 팬에 나물을 볶았다.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식욕을 돋웠다. 한 젓가락 집어 맛을 보았다. 나물 특유의 향이 미각을 깨웠다. 밥을 먹고 늦은 밤 베란다로 나가 밤하늘에 두둥실 떠오른 달을 보았다. 둥근 달을 보고 있자니 아름다운 우리 옛 시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 달님이시여. 주절 주절~. 달멍하다 보니 문득 달이 녹두전으로 보였다. 호빵도 닮았다. 냉장고 냉동실에 하나 남은 호빵을 꺼냈다. <지방부장>
우난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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