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호인' 포스터 |
10일 워싱턴 포스트에서 바라본 한국 대통령 선거의 모습이다. 역대 최악의 진흙탕 선거로 지탄 받고 있는 대선 후보들 사이에서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환하면서까지 설전을 벌이고 있다. 자연스레 2013년말 개봉해 천만 관객을 훌쩍 넘긴 영화 '변호인(2013년)'이 떠오른다.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판단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공안경찰 차동영 경감(곽도원 분)의 증언에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의 격정 어린 토로다. 송우석 변호사는 영화 마지막 자막에서 밝히듯이 노무현 대통령을 영화화한 인물. 영화의 설정은 각색된 허구지만 논픽션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특히 99명의 변호인이 호명돼 일어서며, '이날 법정에는 부산지역 변호사 142명 중 99명이 출석했다'는 자막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사실 부산 법정이 아니라 1974년 민청학련 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하다 자신조차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강신옥 변호사 재판정 모습이었다. 강신옥 변호사의 군법회의 재판에는 100명의 변호사가 변호인으로 나선다. 이후 13년이 지난 1987년 6월항쟁 이후 대법원은 강신옥 변호사에게 무죄판결을 내린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대한민국 국민은 '국민이 곧 국가인 나라'에 살고 있는가? 국민이 곧 국가인 나라라면 엄밀히 법철학 측면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우선해야 한다. 그러나 1987년 개헌 헌법은 통치권에 우선하는 법체계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법체계가 모델로 하고 있는 서구의 헌법에 대한 시각은 '통치권'을 중심으로 보느냐, 아니면 '기본권'을 중심으로 보느냐 하는 두 가지 입장과 시각으로 나뉘어 왔다. 독일의 법체계를 예로 들자면 흔히 칼슈미츠 의 '결단주의'의 입장은 국가의 통치권에 우선하여 헌법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반면 루돌프 스멘트의 '동화적 통합이론'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기본권을 바탕으로 사회나 국가를 계약관계로 보는 존로크와 루소 이후의 계약론에 입각하여 헌법을 바라보며 인간의 기본권에 우선한다.
독일도 바이마르 헌법 이후 '통치권' 중심의 법체계였으나 오늘날 독일 헌법 제1조 1항은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어서는 안되며, 국가는 이 불가침의 원칙을 확인하고 보호할 의무를 지닌다"라 명시하고 있다.
그저 돈 버는 변호사이던 송우석 변호사가 학생운동을 하던 돼지국밥집 아들 진우를 나무라자 진우가 항변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계란 아무리 던져봐라. 바위가 부서지나?"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기고 계란은 아무리 약해도 살은 기라고, 계란은 그것을 깨고 일어나 바위를 넘는다……."
독재체제로 굳어진 국가는 바위이고, 계란은 살아 역동하는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향한 움직임이 아닌가 생각되는 대목이다. 1987년 제정 헌법은 알다시피 밀실에서 여야 몇 명의 정치인이 합의해 신문 공고 절차를 거친 헌법이다. 국민 참여나 합의의 절차는 없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나아갈 길로 이른바 '87레짐 청산'을 제시하곤 한다. 이번 대선에서도 여당 후보가 '4년중제 개헌'을 내세우며 개헌을 공론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국민 기본권'에 우선하는 개헌이 근본적으로 '87레짐'을 청산하는 개헌이 아닌가 묻고 싶다. 언제까지 우리나라는 위로부터의 통치권에만 주목할 것인가?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 전날 후보이던 노무현 대통령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마십시오.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바꾸는 힘은 국민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만 20년이 지난 오늘 대선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목소리가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변함 없이 오늘의 정치가 썩어 있고 국민이 바꿀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권위주의 청산, 또 기득권을 내려놓으려 노력했던 '노무현 정신'마저 더럽히는 오늘 우리 정치가 아닌가 한탄스럽다. 나아가 통치권에만 주목하다가는 국민이 위임한 권리를 '기득권', 또는 '특권'으로 변질시키는 패악을 반복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심상협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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