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혼상제 말고도 인생에 있어 중요한 순간은 많다. 시대에 따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 영정조 시대를 문예부흥기로 본다. 경제를 비롯한 사회 모든 분야가 풍요로웠고, 외침도 없어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런 삶이 자랑스럽고 기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인생에 있어 영광된 순간을 그림으로 남겼다. 평생도(平生圖)이다. 주로 8폭 병풍으로 그렸으나 10폭, 12폭도 있다. 사대부 사이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민간까지 번졌다.
김홍도가 그린 모당평생도(慕堂平生圖)를 중심으로 내용을 살피면, 돌잔치, 서당 글공부, 전안례와 혼례, 과장응시, 삼일유가((三日遊街, 과거에 급제하고 삼일 간 일가친척과 지인을 찾아 인사), 벼슬길과 승진에 따른 부임행차, 회방(回榜, 벼슬 오른지 60년)식, 회혼(回婚, 혼인 60주년)식 등이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건이 다름은 당연하다.
평생도에 회갑연은 없다. 당시엔 회갑까지 살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 유년시절 회갑연은 중요 행사 중 하나였다. 주요애경사로 본인의 혼인, 부모회갑, 부모상을 꼽았다. 평균 수명이 육십 전후여서 장수를 축하했음이다. 지금은 평균수명이 팔십이 넘는다. 회갑이 특별한 축하 대상이 될 수 없다. 생일 축하보다 약간 크게 모임을 갖는 것으로 가름한다. 따라서 회갑연도 사라진 문화의 하나가 되었다.
회갑연은 일가친척 만남의 기회였다. 가까운 사람끼리 마주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인생의 의미는 만남에 있지 않은가? 사람은 사람 사이에 있을 때 존재감이 확대된다. 서로 확인한다. 뿐만 아니라, 건전한 음주가무의 현장이었다. 문화예술 인프라요, 재창조의 원동력이었다. 삶의 활력소였다.
예전엔 교통 불편으로 만나기 어려웠다면, 지금은 일이 많아 만나기 어렵다. 상호 오간다 해도 다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할 수 없다. 때문에, 또 다른 만남의 기회가 등장할 것으로 본다.
중학교 다닐 때 할아버지 회갑잔치가 있었다. 잔치는 삼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학교에 가야하므로 함께하지 못해서 잔치 전체 상황을 알지 못한다. 다른 집의 회갑연도 보지 못했다. 학업을 마쳤을 때는 회갑연이 식당 또는 별도의 연회장에서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당시의 유품도 없어 풍습을 생생하게 전 할 수 없다. 아쉬움이 크지만, 필자가 경험한 회갑연은 이렇다.
경향각지로 일가친척에게 소식을 전함은 물론, 며칠 전부터 음식을 준비한다. 잔치 전날에는 음식 괴는 전문가가 와서 온종일 과일과 각종음식을 높이 쌓는다. 두자 내외가 되었던 것 같다. 깎고 다듬어 음식마다 같은 크기로 만들고, 꿀을 발라 쌓아 올렸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치알(遮日)을 친다. 집이 있는 쪽에 병풍을 여러 개 펼쳐 세운다. 그 앞에 주인공 부부와 같은 서열에 해당하는 분들이 앉을 방석을 놓는다. 처음엔 할아버지 내외만 의관을 정제하고 앉는다. 그 앞에는 거창한 상이 차려져있다. 상 앞에는 수복강령(壽福康?)이라 써 붙였다.
장손부터 차례로 절하고 술도 올린다. 일가친척, 이웃들까지 하다 보니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다. 음주가무로 이어진다. 전문 소리꾼도 불러들였다. 악기는 장구가 전부였지만 부족함이 없었다. 동네 사람 대부분도 삼일동안 함께 어울렸다. 흥이 없는 사람 없고, 끼 없는 사람이 없었다.
낭비, 사치, 호사로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정부가 절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반인이 하는 행사가 호사스러울 리 없다. 어찌 관이나 갑부 행사와 견줄 수 있으랴? 음지에서 노는 퇴폐문화와도 거리가 멀다. 놀이, 즐기는 것을 막으면 안 된다.
논어(論語) 육장 옹야편(雍也篇) 이르지 않았는가?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즐겁게 할 때 효율도 결과도 배가된다. 뿐이랴, 바람직한 인생은 즐기는 데 있다. 즐거움은 흥으로 더 커진다. 생동감이 넘치고 풍요로워진다. 흥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마음껏 흥을 돋우자.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