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리호' 중 한 장면 |
돈이라면 닥치는 대로 달려드는 우주 쓰레기 청소부 장 선장(장현숙 역, 김태리 분), 태호(송중기 분), 타이거 박(진선규 분), 업동이(유해진 목소리 분)가 대량살상 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박예린 분)를 발견하고 돈벌이를 하려다가 뜻하지 않은 모험에 휘말리는 SF 판타지 액션 서사.
기본적인 갈등은 '악의 축'으로 상징되는 자본과 기득권의 상징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 분)과 거대자본 UTS로 대표되는 '가부장 기득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장 선장과 태호를 비롯한 주인공들의 투쟁으로 그려진다.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이야기 속 미래의 남성상과 여성상, 또 남녀 관계의 새로운 모습들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성 전사 장 선장은 태호와 중심축을 이루면서 기존 남성 중심의 영웅상을 나누어 맡는다. 유해진 목소리로 나오는 중성적인 전투 로봇 업동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여성 업동이(김향기 분)여성으로 변신한다. 강꽃님도 중성적인 캐릭터.
다이내믹하고 상투적인 기승전 스토리 결말에 얼핏 스치는 책 한 권이 오늘 우리가 겪는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 특히 가부장적인 허위적인 기득권에 던지는 메시지를 상징하는 듯해 다시 찾아 읽게 된다. 바로 여성을 선택한 업동이가 읽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삶과 노래』.
영화엔 나오지 않지만 릴케의 시는 오늘을 사는 청년들이 특권을 행사하고 유지하려는 기득권층을 향한 건강하고도 힘찬 목소리로 울려온다. 다가오는 봄 대선으로 기득권을 연장하려는 특권층이 귀 기울여 반성하고 참회해야 할 목소리이다.
01 인생
인생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된다.
인생은 축제일 같은 것이다.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받아 들여라.
길을 걷는 어린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실려 오는
많은 꽃잎을 개의치 않듯이.
어린 아이는 꽃잎을 주워서
모아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머무르고 싶어 하는데도
머리카락에 앉은 꽃잎을 가볍게 털어 버린다.
그러고는 앳된 나이의
새로운 꽃잎에 손을 내민다.
02.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마음 속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굳게 닫힌 방이나 낯선 언어로 적힌 책처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수는 없다.
아직은 그것들을 모두 살아볼 수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살아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아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너는 해답 속에 들어와 살고 있을 것이다.
03. 한 번만이라도 아주 조용해졌으면
한 번만이라도 아주 조용해졌으면.
뜻밖의 것이, 우연한 것이,
그리고 이웃의 웃음이 갑자기 침묵한다면,
나의 감각이 내는 소음이
내가 망보는 것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오만 가지 상념으로 당신을
머리에서 발 끝까지 생각하고
(미소 한 번 지을 동안만)
당신을 소유하겠습니다.
모든 생명에게서 감사의 표시인 양
당신을 선사하기 위하여.
04. 그대를 생각하는 즐거움
아주 종종
그대를 생각합니다.
그대는 끊임 없이 내 마음 속에 찾아 들지요.
그대를 생각합니다.
뜻하지 않는 시간에 뜻하지 않는 곳에서.
그대에 대한 아름다운 생각을 하면서
끊임 없이 놀라게 되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요.
05.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져야 하네.
사랑이라고 불리는 그것
두 사람의 것이라고 보이는 그것은 사실
홀로 따로따로 있어야만 비로소 충분히 펼쳐져
마침내 완성되는 것이기에.
사랑이 오직 자기 감정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자기를 연마하는 나날이 되네.
서로에게 부담스런 짐이 되지 않으며
그 거리에서 끊임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두 사람이 겪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혼자가 되라.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삶의 노래' 중에서
독자들이여, 읽어 보셨는가?
'나'로부터 '당신'과 '그대'로 나아가 종국엔 다시 '혼자'가 되어 성찰하라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삶의 노래』. 이 봄 우리 청년들이 진정 개인의 권리를 찾아 나가는 여정의 이정표가 아닐까 읽고 또 읽어 본다.
곧 새봄 푸르른 어린 순들이 청춘과 더불어 푸르러 올 것이다. 공정하고 평등하며 서로 존중하는 개인들이여, 청년들이여. 당신들다운 목소리와 몸짓으로 푸르르라.
영화 '승리호' 속 세계가 여전히 청년들이 투쟁으로 맞서야 할 세계이듯이 우리 현실 도한 온몸으로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기득권 층들의 세계이다.
심상협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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