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아, 글쎄 그냥그냥 가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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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아, 글쎄 그냥그냥 가 버렸어요

솔향 남상선 / 수필가, 전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 승인 2022-02-04 09:19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세상엔 무수히 많은 길이 있다. 산책 나가는 오솔길도 있고, 애인 만나러 가는 설레는 길도 있다.

친구와 바위 벼랑 타는 암반 길도 있고, 청춘 남녀가 낭만을 수놓는 바닷가 백사장 길도 있다.

또 자식이 보내드리는 효도관광으로 걸어야 하는 둘렛길도 있고, 귀염둥이 손주 보러 가는 기다림의 길도 있다.

그런가 하면 화창한 봄날 아가씨들 사뿐사뿐 걷는 꽃길도 있고, 순희, 영자 소근 거리며 달래 캐는 정담의 논둑길과 산기슭 언덕길도 있다.



한편 요란한 천둥소리 안고 떨어지는 소낙비 피하려다 소나기 맞고 뛰는 시원한 길이 있는가 하면, 와삭와삭 단풍 낙엽 밟으면서 인생을 음미하며 걷는 가을 서정의 길도 있다.

점입가경으로 흰 눈 내리는 빙판 썰매 타러 가는 길도 있고, 눈싸움으로 개처럼 펄펄 뛰는 개구쟁이 뒹구는 눈길도 있다. 걸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 반주삼아 걸어야 하는 겨울의 눈길을 어찌 빼놓을 수 있으랴.

어쨌든 걷는 길이 무수히 많지만 한 번 걸었다가 다시 되짚어 올 수 있는 길들이다. 어떤 길이건 마음을 두고 왔으면 되짚어 다시 걸어 볼 수 있는 길이다.

허나, 천하 바보의 그림자였던 모나리자 미소의 내 반쪽 여인이 간 길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뭐 그리 급하다고 서둘러 아, 글쎄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리고 말았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그 머나 먼 길을 돌아보지도 않고 훌쩍 떠나고 말았다.

기축년 9월 27일은 하늘의 해도 달도 다 빛을 잃은 하루를 온통 어둠으로 뒤덮었다. 별 하나 없는 칠흑의 어둠에 들리는 건 천지를 진동하는 통곡소리밖에 없었다. 그건 통곡소리라기보다는 절망의 늪에서 부르짖는 산 자의 비명 같은 절규의 몸부림이었다. 산책길에 영업용택시로 받힌 내 반쪽의 그림자가 말 한 마디 못하고 어둠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생사의 명암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아 글쎄 가버렸어요. 멍든 가슴 휘저어 놓고 가버렸어요.

7남매 장남 아내자리 누가 하라고, 자리만 남겨놓고 가버렸어요.

한 이불 같이 덮던 서른여섯 해 뒤로 하고 매정하게 가 버렸어요.

바보 남편 가슴에 대못만 박아 놓고 말 한 마디 없이 그냥 가버렸어요.

학교밖에 모르던 바보남편 반성시키느라 아, 글쎄 떠나고 말았어요.

바보 남편 TJB 교육대상 받을 때 그렇게 좋아하던 내 반쪽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어요.

가난 속 7남매 장남 아내 하느라 지지고 볶는 어려운 날들이었는데 아, 글쎄 가 버렸어요.

현대판 한석봉 엄마노릇 하면서도, 바가지 한번 긁잖고 맘 편케 해주더니, 아, 글쎄 가 버렸어요.

나이에 떠밀려 철들어 가는 남매를 울려 놓고 가 버렸어요,

형수자리, 올케 자리, 누구더러 어떡하라고 그냥 가버렸어요.

31번 이사에 그 많은 이삿짐 혼자 싸고 들어온 새집 살만하니 아, 글쎄 가 버렸어요.

아들딸 낳은 기쁨에 온갖 시름 잊고 살던 그 천사가 아이들 철이 들 만하니 아, 글쎄 가 버렸어요.

새 며느리감 인사하는 상견례 자리에서 그렇게 예뻐하고 사랑스러워 붙든 손 놓지 못하던 애들 엄마가, 아, 글쎄 가버렸어요.

예식 날짜 잡아놓고 그 3개월도 안 되겠는지 아, 글쎄 가버렸어요.

평생 처음 관광지 뉴질랜드서 베이비 램 상의 하나 사 주었더니 그걸 아끼느라 옷장 속에 넣어 두고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채 아, 글쎄 가 버렸어요.

사고 치는 학생 문제로 내 힘들어 하고 고민할 때

< 힘 내세요. 당신 곁엔 우리가 있잖아요. 추운 겨울 지나면, 꽃피는 봄날은 어김없이 올 거요. > 하며 해맑은 미소로 응원하던 그 천사가 아, 글쎄 가버렸어요.

서른여섯 해 한 이불 덮고 사는 동안 고생만 시키고 잘 해 준 것 하나 없는데, 아, 글쎄 가버렸어요.

옷 한 벌 제대로 입히지 못하고,

꽃 한 송이 제대로 사 준 적이 없는데

난 어떡하라고 아, 글쎄 그냥그냥 가 버렸어요.

못 살 거 같은 세월인데 12월 12일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아들 장가가는 날이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이 모두 빛을 잃은 날이 9월 27일이었으니 채 3개월도 안 되는 혼삿날이 돌아온 거였다.

예식장은 서울 영등포에 있는 번화가였다.

혼주 자리엔 넋이 나간 환자 같은 사람이, 옆 빈자리는 큰 처제가, 아내 대행으로 하객을 맞았다. 천상의 울보도 어쩔 수 없었는지 이를 악물었는지 나오는 눈물을 참느라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즐겁고 기뻐해야 할 혼인집 분위기는 아닌 듯 싶었다. 눈물만 흐르지 않았지 초상집 상주 같은 표정으로 하객을 맞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런 대로 잘 참았던 눈물이, 예식 마지막 절차인 신랑신부가 양가 부모님께 인사하는(절하는) 자리에서 탁 터지고 말았다. 장전된 눈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순식간에 혼인집 분위기가 초상집으로 바뀌었다. 기뻐해야 할, 아들 장가가는 날을 그렇게 초상집 분위기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이 울보였다.

허구 많은 혼삿집 중에서 기쁜 날을 훌쩍거리는 눈물로 마무리한 그런 사례는 우리 집이 전대미문의 화제 거리가 될 것이다.

아, 글쎄, 그냥그냥 가 버렸어요.

때를 놓친 만시지탄의 후회는 해 봐야 소용이 없다.

붕어빵 하나라도 스카프 하나라도 있을 때 사주어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 보듬어 주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있을 때 표현해야 한다.

아내 덕분에 시답잖은 철학가가 다 된 거 같다.

' 있을 때 잘해.'

아, 글쎄, 그냥그냥 가 버렸으니 난 어떡하지… !

솔향 남상선 / 수필가, 전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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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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