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제천지역 국악단체인 '속수승평계' 첫 증언자 이장용 선생'…이 선생이 6·25 전쟁 이전에 촬영한 '청풍초등학교 단체 사진'을 보고 있다. 그는 "당시 속수승평계 단원들은 갓을 썼고, 도포와 두루마기 등을 착용했다. 단원들은 각종 악기로 연주했는데, 담장 너머로 그 모습을 봤다"고 처음으로 구슬증언했다. 그는 현재 89세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
제천군지(1969년 제천군지편찬위원회 편찬)는 청풍승평계와 속수승평계의 규모, 소속된 율원(律員·단원) 명단, 악기 구성 등을 기록해 놨다. 악기와 악보는 6·25 전쟁 등으로 아쉽게도 모두 사라졌다. 또 율원, 즉 단원들 역시 이때 모두 향리(鄕里)로 흩어졌다.
두 국악단체의 존재여부는 사실, 제천군지에서 기록된 게 전부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서 본보 취재팀은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제천시 청풍지역 국악단체의 존재여부를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자료 찾기 등을 본격화했다.
취재팀은 제천군지에 기록된 '1893년 청풍승평계와 1918년 속수승평계'의 단원 명단을 중심으로 제천시 청풍면지역을 샅샅이 뒤졌다.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가장 먼저 마을 이장과 주민들을 만났다. 이들 상대로 '국악단체 단원 후손 찾기'에 나선 것이다.
또 기록으로 남아있는 관련 자료 등의 증거들을 찾기 시작했다. '후손과 증거 찾기'는 한해가 바뀔 때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자료 등 증거찾기는 모두 헛수고였다. 청풍호 조성으로 당시 마을은 완전히 수몰돼 가야금 악기 등은 모두 사라졌고, 수몰된 마을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거의 이주했기 때문이다.
'1918년 제천지역 국악단체인 '속수승평계' 첫 증언자 이장용 선생(왼쪽)'…본보는 이 선생의 기록을 영상으로 담고, 그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겼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
제천시 청풍면에 거주했던 한 주민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속수승평계 단원들이 모여서 연습했던 수몰된 마을에, 실제로 거주했던 인물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당시 거주했던 인물이 현재 어디에서 거주하는지, 지금도 생존하고 있는지 등은 알 수 없었다. 산 넘어 산이었다. 추적은 계속됐고, 결국 그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한달 보름째 만이다.
그의 성함은 이장용 씨다. 1934년 생으로 올해나이로 89살이다. 90살을 바라보고 있다. 거주지는 제천시다.
그를 바로 만났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했다. 뿐만 아니라 제천군지의 기록과 거의 일치했고, 본보의 기사 내용과도 소름 끼칠 정도로 맞아 떨어졌다. 그는 본보의 속수승평계 등의 관련 기사를 못 봤다고 설명했다.
'1918년 제천지역 국악단체인 '속수승평계' 첫 증언자 이장용 선생(왼쪽)'…이 선생은 1940년도 중반 초교시절, '읍하리 마을 지도'를 직접 그리고 있다. 그의 기억은 생생했고, 매우 구체적이다. 당시 이 선생 거주지는 속수승평계 단원들의 연습장소와 불과 100m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
이 선생은 당시 청풍지서(파출소) 앞에 살았다. 속수승평계 단원들의 연습 장소는 이 선생의 거주지 인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선생의 거주지와 속수승평계 단원들의 연습장소는 120m가량 떨어졌다.
이 선생은 초교 고학년 시절 등·하교 때, 속수승평계 단원들의 연습 모습을 대문 틈과 담장 너머로 종종 보고 들었다고 했다. 단원들의 복장은 갓을 썼고, 도포와 두루마기 등을 착용했다.
연습 장소에서는 소리(창)와 젓대(대금) 등의 관악기 소리, 가야금 등의 현악기 소리, 타악(북과 장구 등) 소리 등이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단원들은 대략 20명정도다. 그의 기억은 6·25 전쟁이 터지기 수년 전인 것으로 보여진다. 또 속수승평계가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무렵인 것으로 짐작된다.
1918년 제천지역 국악단체인 '속수승평계' 첫 증언자 이장용 선생이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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