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가장이 되어 동네 마트에서 알바를 하면서 힘들고 무의미한 삶을 사는 할리는 술만이 유일한 도피처이다. 그렇게 어렵게 살던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어준 대상은 이웃집 유부녀 '캘리' 뿐이다.
자주 만나면 정든다고 둘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이에 분노한 큰 여동생 앰버는 그녀를 찾아가 살해하고, 이에 책임감을 느낀 할리는 대신 자수하여 수감된다.
영화 '트라우마'는 소위 '콩가루 집안'의 전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할리의 아버지는 생전에 자신의 둘째 딸에게까지 성폭력을 일삼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알면서도 어머니는 묵과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분개한 둘째 딸은 어머니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발사된 총알을 아버지가 대신 맞으면서 죽고, 이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어머니는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허위 신고를 하면서 구속된 것이었다.
"지옥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고 절규하는 할리의 모습에서 가장의 폭력과 가정 내 폭력의 심각성을 새삼 고찰하게 된다. 할리는 괴로운 현실에서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으면 차라리 감옥을 선택했을까…….
이처럼 심각한 가정 폭력의 일차적 책임은 전적으로 가장(家長)이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가정 폭력이 우리나라에선 벌어지지 않는 '강 건너 불구경'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구랍(舊臘) 12월 18일 이탈리아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가정 폭력 생존자 등과 대화하던 중 "가정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이 매우 많다"며 "가정 내 학대 행위는 사탄과 같은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가정 폭력이 얼마나 나쁜 행위인지를 지적한 것이다. 아울러 "성모 마리아는 맨몸으로 수난을 당하고도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 앞에서 끝까지 존엄을 잃지 않았다"며 "당신에게도 그런 존엄이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교황이 가정 폭력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내놓은 것은 코로나 19 이후 세계적으로 가정 내 폭력이 증가한 현상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트라우마(trauma)는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이다.
여러 가지 정신 장애의 원인이 될 수도 있어서 대단히 위험하다. 결론적으로 트라우마는 애당초 발생 초기부터 그 싹을 잘라야 한다. 나태주 시인은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고 했다.
가정 폭력도 마찬가지다. "자세히 살펴야 보인다, 오래 보아야 답이 나온다, 네가 그렇다."
홍경석 / 작가·'초경서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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