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섭 교수 |
난 그때 내가 가진 모든 논리를 동원해 지역 인사들이 요구하는 내용이 이치에 닿지 않음을 따졌고, 심지어 그렇게 존경하는 이문구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과연 후손들이 본인 문학관 형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 동의할 것인지에 대한 추궁으로 말문을 막아버렸다. 돌아와서 나이 든 분들을 상기된 얼굴로 만든 송구함으로 선생을 검색하게 됐고, 그 결과 매우 흥미로운 사실들을 깨달았다.
한산 이씨 가문으로 보령에 정착해 살며 선친이 해방공간에서 농민들을 도우면서 남로당에 연루된 탓에 6.25 전쟁 때 형들과 함께 처형돼 곧 할아버지와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면서 졸지에 가장이 됐다. 어린 나이에 상경해 막노동으로 살면서 문학의 길을 걸어온 인생역정이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문체의 아름다움으로 말하자면 북의 홍명희 남의 이문구'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가 그동안 왜 한 번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에게는 빨갱이 자식 낙인이 오랫동안 은둔 거사로 살도록 한 시대적 아픔이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관촌수필을 펼쳐 들었다.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옛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로부터 시작되는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표현은, "그러니 하루이틀두 아니구 월매나 속을 끓인데유." "속쎅여싸서 그런지 벌써 새치가 히끔거려유." "어매- 는 츠녀가 헐 소리 안 헐 소리 웂이......"
대화체에 이르면 뜻은 고사하고 발음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관촌수필이 등장한 이래로 수험생들 애먹이는 골칫거리가 되었단다.
관촌수필을 토속어와 사투리가 가득하고 문체가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평가하지만, 특히 충청도 사람들에게는 필독으로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사투리 말투를 그대로 따라 읽다 보면 어린 시절 동네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이웃들과 얘기 나누던 모습이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 잃어버렸던 단어도 새로 태어나고 잊었던 사람도 떠오른다.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우연히 과자를 먹다가 그 맛과 향을 따라 어린 시절 기억을 넘나들며 소설이 전개되는 것처럼.
고향을 떠나면서 사투리 억양을 지우려 무던히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여전히 대화가 길어지다 보면, "혹시, 고향이……."하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했나 보다. 상대는 정감 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난 공연히 뭔가를 들킨 것 같아 쑥스러워지기도 했다. 충청도 말은 그 어느 지방 말보다도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 같다. 한반도로 들고나는 온갖 새로운 문화가 충청도를 통했음을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기에 그 과정에서 쌓인 풍부한 얘깃거리가 말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충청도 어휘와 언어를 외래어와 표준말 강제 속에서 잊어간다는 것이다. 말을 잃는다는 것은 정서를 잃는 것이며 자부심을 잃는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 균형, 마음을 다하는 의리, 열린 유연함과 포용력은 충청인의 모습이자 자부심이다. '의기와 충절의 고장'으로 유달리 독립지사가 많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멍청도'와 '핫바지' 굴레를 씌우려고 애쓴 이들은 편협하고 독선적인 타지 사람들이었다. '응큼함'은 멍청하지도, 핫바지도 아님을 보여주는 똑똑함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그리운 이들을 못 보고 지내야 하는 이 겨울, 충청인의 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관촌수필을 소리 내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송복섭 한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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