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관촌수필 다시 읽기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관촌수필 다시 읽기

송복섭 한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 승인 2022-01-03 08:35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송복섭 한밭대 건축학과 교수
송복섭 교수
십여 년쯤 전 충남 보령시청으로 자문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설계경기를 통해 선정된 ‘이문구 문학관’ 설계안에 대한 기술자문이었는데, 당시 참석한 지역 문화계 인사들의 반응이 유별나 보였다. 설계경기란 제출된 안 가운데서 전문가들이 숙고 끝에 가장 잘 된 작품을 뽑는 것인데, 선정된 안이 이문구 선생의 작품세계와 맞지 않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설계경기에서 당선작을 선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계약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인가?

난 그때 내가 가진 모든 논리를 동원해 지역 인사들이 요구하는 내용이 이치에 닿지 않음을 따졌고, 심지어 그렇게 존경하는 이문구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과연 후손들이 본인 문학관 형태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 동의할 것인지에 대한 추궁으로 말문을 막아버렸다. 돌아와서 나이 든 분들을 상기된 얼굴로 만든 송구함으로 선생을 검색하게 됐고, 그 결과 매우 흥미로운 사실들을 깨달았다.

한산 이씨 가문으로 보령에 정착해 살며 선친이 해방공간에서 농민들을 도우면서 남로당에 연루된 탓에 6.25 전쟁 때 형들과 함께 처형돼 곧 할아버지와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면서 졸지에 가장이 됐다. 어린 나이에 상경해 막노동으로 살면서 문학의 길을 걸어온 인생역정이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문체의 아름다움으로 말하자면 북의 홍명희 남의 이문구'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가 그동안 왜 한 번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에게는 빨갱이 자식 낙인이 오랫동안 은둔 거사로 살도록 한 시대적 아픔이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관촌수필을 펼쳐 들었다.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옛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로부터 시작되는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표현은, "그러니 하루이틀두 아니구 월매나 속을 끓인데유." "속쎅여싸서 그런지 벌써 새치가 히끔거려유." "어매- 는 츠녀가 헐 소리 안 헐 소리 웂이......"

대화체에 이르면 뜻은 고사하고 발음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관촌수필이 등장한 이래로 수험생들 애먹이는 골칫거리가 되었단다.

관촌수필을 토속어와 사투리가 가득하고 문체가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평가하지만, 특히 충청도 사람들에게는 필독으로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사투리 말투를 그대로 따라 읽다 보면 어린 시절 동네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이웃들과 얘기 나누던 모습이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 잃어버렸던 단어도 새로 태어나고 잊었던 사람도 떠오른다.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우연히 과자를 먹다가 그 맛과 향을 따라 어린 시절 기억을 넘나들며 소설이 전개되는 것처럼.

고향을 떠나면서 사투리 억양을 지우려 무던히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여전히 대화가 길어지다 보면, "혹시, 고향이……."하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했나 보다. 상대는 정감 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난 공연히 뭔가를 들킨 것 같아 쑥스러워지기도 했다. 충청도 말은 그 어느 지방 말보다도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 같다. 한반도로 들고나는 온갖 새로운 문화가 충청도를 통했음을 누구나가 아는 사실이기에 그 과정에서 쌓인 풍부한 얘깃거리가 말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충청도 어휘와 언어를 외래어와 표준말 강제 속에서 잊어간다는 것이다. 말을 잃는다는 것은 정서를 잃는 것이며 자부심을 잃는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 균형, 마음을 다하는 의리, 열린 유연함과 포용력은 충청인의 모습이자 자부심이다. '의기와 충절의 고장'으로 유달리 독립지사가 많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멍청도'와 '핫바지' 굴레를 씌우려고 애쓴 이들은 편협하고 독선적인 타지 사람들이었다. '응큼함'은 멍청하지도, 핫바지도 아님을 보여주는 똑똑함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그리운 이들을 못 보고 지내야 하는 이 겨울, 충청인의 본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관촌수필을 소리 내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송복섭 한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현장]3층 높이 쓰레기더미 주택 대청소…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2.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3. 차세대 스마트 교통안전 플랫폼 전문기업, '(주)퀀텀게이트' 주목
  4. 전국 아파트 값 하락 전환… 충청권 하락 폭 더 커져
  5. 대전시, 12월부터 배출가스 5등급 차량 운행 제한
  1.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2. 더젠병원, 한빛고 야구부에 100만 원 장학금 전달
  3. 한화이글스, 라이언 와이스 재계약 체결
  4. 유등노인복지관, 후원자.자원봉사자의 날
  5. [화제의 인물]직원들 환갑잔치 해주는 대전아너소사이어티 117호 고윤석 (주)파인네스트 대표

헤드라인 뉴스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환이야, 많이 아팠지. 네가 떠나는 금요일, 마침 우리를 만나고서 작별했지. 이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환이를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21일 대전 서구 괴곡동 대전시립 추모공원에 작별의 편지를 읽는 낮은 목소리가 말 없는 무덤을 맴돌았다. 시립묘지 안에 정성스럽게 키운 향나무 아래에 방임과 학대 속에 고통을 겪은 '환이(가명)'는 그렇게 안장됐다. 2022년 11월 친모의 학대로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된 환이는 충남대병원 소아 중환자실에서 24개월을 치료에 응했고, 외롭지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24시간 환..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22일 대전에서 열린 환경부의 금강권역 하천유역 수자원관리계획 공청회가 환경단체와 청양 주민들의 강한 반발 속에 개최 2시간 만에 종료됐다. 환경부는 이날 오후 2시부터 대전컨벤션센터(DCC)에서 공청회를 개최했다. 환경단체와 청양 지천댐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공청회 개최 전부터 단상에 가까운 앞좌석에 앉아 '꼼수로 신규댐 건설을 획책하는 졸속 공청회 반대한다' 등의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은 경찰력을 투입해 공청회와 토론이 진행될 단상 앞을 지켰다. 서해엽 환경부 수자원개발과장 "정상적인 공청회 진행을 위해 정숙해달라"며 마..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