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한 대전대 교수 |
하지만 이런 기복 사상이 만들어진 것은 그 역사가 길지 않다. 오히려 새해 1월 1일은 겉보기와 다르게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50대 이후의 세대들에겐 이런 정서로부터 더더욱 자유롭지 않았다.
30여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는 두 개의 설이 있었다. 양력설인 1월 1일의 신정(新正)이 그 하나이고, 음력설인 구정(舊正)이 다른 하나이다. 요즘 세대에겐 신정과 구정이란 말이 모두 낯설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에는 이런 이분법이란 적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력설인 신정은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일종의 연호와 관련이 깊은 것인데, 잘 알려진 것처럼, 과거 우리의 연호는 대개 중국의 것을 따랐다. 가령, 만력(萬曆) 몇 년, 강희(康熙) 몇 년 하는 식으로 연도를 표기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1896년(고종 32년)에 이르러 중국식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물론 이 즈음은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여 우리식의 융희 등을 연호로 사용하기도 했다), 태양력을 받아들여 정식 연호로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설을 둘러싼 논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태양력을 사용하되 음력설은 여전히 우리 최대의 명절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일제는 우리 민족이나 문화를 말살하는 차원에서 음력 설 자체를 부정하고, 이때 행해지던 여러 세시풍속 또한 금지시켰다. 그들만의 방식, 문화에 따라 양력설을 쇠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나라의 주권이 없으니 이들의 강요에 대해 어떤 이견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사라질 뻔했던 음력설은 해방되고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음력설은 이른바 이중과세(二重過歲)의 문제와, 양력설이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다는 논리에 따라서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재 정권과 군사 정권은 민족 고유의 명절인 음력설 문제에 대해서는 요지부동이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일상의 한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도시도 그러하지만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은 이 문제가 함의하고 있는 진영 논리를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근대를 접한 사람들, 가령 교사라든가 공무원 등과 같은 식자층들은 이때 모두 양력설을 쇠고 있었다. 그들이 이런 정책을 지지한 것인지 아니면 강요에 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어떻든 현실은 그러했다. 반면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음력설을 고유의 명절로 수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음력설을 명절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소위 근대적인 것, 상층 문화로부터 비껴서 있는 존재들로 비춰졌다. 한 나라의 고유한 명절을 두고 이런 정서의 갈라치기가 생겨날 수 있었던 사실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그지없다.
어떻든 음력설을 막아보고자 하는 과거 정권들의 방해는 집요했다. 심지어는 음력설에 표시되었던 빨간 날, 곧 공휴일까지 없애버렸다. 그럼에도 수많은 대중들은 음력설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열차 표를 사기 위해 매표소 앞에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고, 자동차가 없던 시절에도 고속도로는 여전히 붐볐다. 그러다가 음력설을 공휴일일로 지정하겠다는 대선 공약, 총선 공약까지 나왔다. 그러니 정부로서도 음력설에 대해 더 이상 막을 명분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구정을 1985년에는 민속의 날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다음 1989년에는 비로소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이제 음력 1월 1일은 정식 설날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전통은 어느 한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만 년의 세월 속에서 축적된, 민족의 심연 속에서 도도히 흐르는 것이기에 어떤 강요나 압제에 의하여 쉽게 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신정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설날이라는 지위를 잃게 되었다. 그렇다고 신정이 갖고 있는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이제 해맞이라든가 한해의 새로운 다짐을 위한 시작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기 시작한 까닭이다. 새해 1월 1일, 곧 신정은 축제 문화가 사라지고 개인화되고 있는 요즈음 우리의 또 다른 집단 문화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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