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청풍승평계, 속수승평계 고문서'…이 문헌들은 1969년 제천군지 책에 일부가 흑백사진으로 실린 이후 사라졌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아쉬움만 주고 있다. <국악음반박물관 제공> |
청풍승평계는 창단 이후, 진화했다. 발전 과정은 1969년 제천군지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제천군지에서 엿볼 수 있다.
1893년 제천시 청풍면에서 조직된 제천 청풍승평계(국악단체)는 창단 이후 그 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25년 뒤 다시한번 연주단원을 확충하는 등 업그레이드 시킨다. 단원들이 청풍승평계의 창단 이념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성장, 확대, 진화'시켜온 것이다.
청풍승평계의 진화 모습은 서양 오케스트라의 발전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오케스트라는 1926년 중앙악우회인데, 창단 초기 10여명의 단원으로 시작한다. 악기구성도 성악과 피아노, 바이올린 등 소규모다. 중앙앙우회는 해를 거듭하면서 발전한다. 첫 창단 당시, 단원 10여명으로 시작했다면 현재는 대개 50~100여명의 대규모로 연주한다. 서양음악이 100여년동안 계승, 발전했다는 얘기다.
'속수(續修)승평계 단원들의 명단'… 이 문서는 속수 승평계 임원(빨간색 부분)과 연주 단원들의 이름, 그리고 출생년도 등이 기록돼 있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단체의 명칭이다. 청풍승평계는 '속수(續修)승평계'로 업그레이드 된 명칭을 사용했다.
청풍승평계 명칭에서 '이을 속(續)자와 닦을 수(修)'자를 추가한 것이다. '속수'를 한자로 풀이한다면 '이어서 계속 수련한다'는 뜻과 같다.
1893년 창단한 청풍승평계는 한 단계 발전시킬 목적으로 25년 후인 1918년에 속수승평계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속수승평계는 단원도 확충한다. 기존 청풍승평계 단원 33명에서 43명으로 늘린 것이다. 10명이 더 늘어난 셈이다. 한마디로 대규모 세대교차가 이뤄진 것이다.
특히 청풍승평계에서 속수승평계로 자리를 옮긴 이긍연(이건연)은 '1918년도 속수승평계를 조직하면서…'라는 서언(책 등의 첫머리에 책을 펴내게 된 동기나 경위)을 남겼다. 이긍연의 서언을 쉽게 요약하면 이렇다.
"승평계의 설립이 계사년(癸巳年) 1893년 중춘(仲春·완연한 봄)이다. 음악의 운율은 (제천)청풍호 경치와 일치하고 음악하기 좋은 곳이다. 청풍승평계 단원들의 악기비용, 활동비용 등은 속수승평계에서 더 증액한다. 이런 내용은 청풍지역 현인들, 즉 유지들과 논의했다. 논의결과 청풍승평계에서 받았던 10냥을 속수승평계에서 2원으로 책정한다. 풍소재자(風騷才子), 즉 풍류객은 이 '악(樂·청풍승평계)'을 교훈 삼아서 영원토록 전승하라. 다음 세대는 청풍승평계를 보고 느껴서, 국악의 세계화와 대중화에 앞장서야 한다. 1918년 4월 16일 이긍연(이건연)의 서(緖)"라고 글을 남겼다.
'1969년 제천군지 책에 기록된 '속수(續修)승평계'… 이 문서는 속수 승평계 단원들의 이름과 출생년도 등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이용탁 예술감독은 "청풍승평계가 명칭 변경 등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무용, 성악, 악기 등을 늘려 다양한 음악을 시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청풍승평계는 당시 '비파'라는 악기를 사용했는데, 지금의 국악단 등은 거의 비파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며 "따라서 비파를 사용한 것으로 볼 때, '당대 전통을 기반으로 한 국악단'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청풍승평계의 단원들은 풍류가야(정악 가야금), 산조가야(산조가야금), 양금, 현금(거문고), 당비파(현악·8음), 향비파(현악·8음), 피리(향피리), 젓대(대금), 장고 등을 연주했다. 특히 가야금 산조와 정악을 구분해 연주한 것으로 봐서 정악, 민속음악을 두루 연주한 것으로 보여진다.
노재명 국악학자는 "전통사회 마을 단위의 풍류방은 공간 크기상 대개 기악 독주나 이중주, 시조창, 영산회상 정도 연주할 수 있는 10여명 내외 소규모 인원이 모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그러나 43명으로 편성된 속수승평계는 거의 궁중음악단 규모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놀라운 점은 이러한 대규모 악단을 관에서 조직한 것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형성했다는 것"이라며 "이는 당시 전승이 위태로운 국악을 살리기 위한 제천 청풍면 주민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국악 사랑, 애향심, 자부심이 충만했기에 가능했다고 보여진다"고 강조했다.
노 관장은 이어 "비파 연주자들까지 포함된 점으로 봐서 당시 전문 국악인이 이 악단의 창단과 연주, 단원 교육에 적극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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