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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야기도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훔치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사니 원제가 모호한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보다는 본연의 정체성에 더 맞을수도 있겠다. 혼혈일본계가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기만 해도 '일본의 승리'라며 자축하던 일본인들은 일본의 가장 밑바닥 치부를 전 세계에 알린 이 영화에 대한 환호를 '영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회시스템에서 소외된 사람들, 그들이 이루고 있는 기이한 공동체, 명백한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는 일본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문제다.
그래서, 현실의 견고한 시스템과 그로 인한 패배와 좌절을 오롯히 말하는 영화는 비단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든 환영받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그대로 투영하는 영화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더 이상 영화적 현타지가 나올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 하는 것 이상으로 현실이 불합리하고, 불완전하고, 비도덕적 세계라면 영화는 저널리즘이 되고, 개인의 생존경쟁이 요구될때 영화는 우리가 나아가야할 공동체의 방향을 말한다.
말, 그리고 지금 우리의 서사를 영상으로 담는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에 담론을 제기한 책들이 출간됐다.
2014년부터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엮어 출간한 강유정 평론가의 '시네마토피아'(강유정 지음, 민음사 펴냄, 436쪽)가 문학과 영화, 저널리즘을 통해 한국 사회의 현재를 다각도로 바라보고 있다면,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지영 지음, 광화문글방 펴냄, 260쪽)은 갑자기 모국어를 잃은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젠더일까? 한민족 일까? 동양인일까? 약자일까 강자일까?
실제 기자의 모습이 아닌 우리가 보고 싶은 혹은 보여지고 싶은 기자의 모습들만 영화에 나온다고 말하는 작가는 영화 '스포트라이트'와 '자백',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을 통해 기자가 사라지고 영화가 저널리즘처럼 사회적 진실 규명을 추구하게 된 현실을 집어낸다.
어느덧 기자가 기레기가 되고, 가짜 뉴스로 대중의 신뢰를 읽고 있는 언론의 자기 검열과 역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 날카롭다.
이와 함께 어느날 낯설고 외딴곳에서 사투를 벌여야 하는 청소년들을 그린 '헝거게임', '메이저러너'를 통해 견고하고 위협적인 사회시스템에서의 생존 경쟁을 말한다.
작가가 여러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금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원하는 가"이다. 영화 '동주'의 동지애적인 관계가 아닌 각자의 신념을 존중하는 우정을 보면 작가가 그리는 공동체를 유추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를 통해 우리사회의 어둡고 무겁고, 그래서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끄집어 낸 작가의 질문은 세련되고 산뜻하다.
▲어느날 내가 모국어를 할수 없게 된다면.....'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테세우스와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탄 배는 아테네인들에 의해 데메트리오스 팔레레우스의 시대까지 유지 보수됐다. 부식된 헌 널빤지를 뜯어내고 튼튼한 새 목재를 덧대어 붙이기를 거듭하니, "배의 모든 부분이 교체되었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바로 그 배'인가?"라는 질문이 철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됐다. "어떤 이들은 배가 그대로 남았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배가 다른 것이됐다"고 주장했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은 테세우스의 배처럼 모국어를 잃고 한국어를 쓰게 된 주인공이 언어적 정체성이 바뀐 존재가 되면서 과거의 존재가 전체 인생에서 진짜 본질이 맞는지에 대한 실존적 화두를 던진다.
모국어를 잃고 전혀 다른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은 몸에 다른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바뀐 것과 같아 결국 이 세계에서 고립되고 먼지로 사라질수 밖에 없다는 설정은 '언어는 문화이자 반영'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작품 전체를 '수키 증후군'과 관련된 인터뷰와 기사만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도 흥미롭다.
오희룡 기자 huily@
*올랑올랑은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뜻의 순 우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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