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전(한남대 명예교수) |
이 작품의 근본 물음은 독재체제 안에서 표현의 자유는 어떤 의미를 띠며, 어떻게 지탱해야 하는가다. 작품 배경은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볼세비키 10월 혁명으로 새로이 건국된 소비에트 러시아 즉, 1930년대의 소련이며 그 안에서 당시 실제 활동하며 박해를 받았던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1881-1940)와 당시 권력자였던 스탈린(1878-1953)과의 관계가 형상화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적대적은 아니었다. 시를 쓰기도 했던 스탈린은 작가의 공연에 감동해서 15차례나 거듭 봤던 터였다. 작가는 "검열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가장 큰 의무"이며 "자유가 필요 없는 예술가는 물이 필요 없는 물고기"라고 천명한다. 자신의 문학적 특징인 '풍자'에 대해 "풍자를 한다는 건 금지구역을 침범하는 것"이며 "진정한 예술가에게 금지구역이란 없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이런 작가의 언어가 두려운 스탈린은 이렇게 토로한다. "민중의 마음은 너무 변덕스러워서… 민중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적으로부터 지켜내는 게 훨씬 쉬워.(…) 민중을, 자기 자신에서보다 적으로부터 지켜내는 게 훨씬 더 쉬워." 연극이 민중을 움직여 체제를 뒤흔들 수 있다는 걸 두려워해서 볼가코프의 문학을 금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스탈린은 온갖 음모가 난무하는 정치계에서 느끼는 자신의 고독과 공포를 토로한다. 독을 넣었을 거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는 난 한 입도 먹어 볼 수가 없어. 공기에 독을 퍼뜨렸다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는 난 입을 벌릴 수가 없어. 지배와 피지배의 대척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모두 그 상태에서 자유롭지 않다. 모두 패자인 셈이다. 작품은 불가코프의 청탁의 실현은 이뤄지지 않은 채 끝난다. 그를 돕던 아내도 그의 곁을 떠난다.
한때(1960년대-80년대) 한국 연극계는 번역극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번역극의 비중이 현저히 낮아졌다. 이런 변화는 긍정·부정의 양 측면을 지닌다. 긍정의 측면은 우리의 정서, 생각, 사회 문제 등을 현실적으로 담아내는 창작극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한편 번역극의 퇴조는 우리 연극이 글로벌 문화에 대한 개방성을 지니지 못하고 글로벌 이슈를 놓칠 수 있어, 한국 연극이 자칫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부정적 측면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 문제작이 좀 더 적극적으로 한국 무대에 수용될 필요가 있을 터인데, 그런 의미에서 금 번의 '스탈린…'공연은 동시대 작가의 특이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지닌 진지함이나 무게감이 얼핏 현실과 멀리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연출이 별로 인기가 없을 이 공연을 감행함은 "위대한 연극, 가장 좋은 연극은 생각하게 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연출이 동의한 때문일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기보다는 지나친 표현의 범람으로 폐해가 유발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미디어로 등장한 유튜브가 개인사를 이슈화해 '피 빨아 먹는장사'를 한다는 비난을 받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 공연이 거꾸로 언론 자유의 의미와 귀중함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불가코프 역을 한 강지구의 연기도 볼만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